정민아

성결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평론가

저예산 힐링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 2주 만에 100만 관객을 훌쩍 넘어섰다. 한국영화 평균제작비가 50억을 넘는 상황에서 이 영화는 15억으로 야무지게 만들어졌고, 80만을 넘으면 손익분기점을 넘긴다. 이 작은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한국영화계에도 본격적으로 슬로우 힐링 영화가 상륙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문화다양성이란 면에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자취를 남긴다. 

201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사회적 변화가 숨 가쁘게 일어나 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까지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발맞추어 새로운 체제를 맞이하면서, 이를 투영하거나 견인한 사회비판 의식으로 가득한 한국영화 역시 계속해서 등장했다(<택시 운전사>, <군함도>, <더 킹>, <아이 캔 스피크>, <재심>, <박열>, <노무현입니다>, <강철비>, <1987>). 그리고 잠시 숨 고르기와 마음의 휴식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 방송가 인기 프로그램을 보면, 쉬고 놀며 밥 해 먹는 쿡방 힐링 예능이 대세이다. 별 것도 없는데 자꾸 보게 되는 <삼시세끼>의 충격은 <윤식당>, <효리네 민박>, <섬총사>로 이어졌다. 화려해 보이는 연예인들이 밥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주변에서 얻은 식재료로 소박하게 꾸민 한국식 밥상은 이상하게 끌린다. 밥 해 먹고 나누는 재미는 너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등 의식을 보여준다고 할까. 

정글 같은 경쟁 사회에서 바빠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머리를 텅 비우고 맛있는 거 먹고, 어린아이처럼 놀고, 게으름뱅이가 되어 쉬는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는 우리가 지금 욕망하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일본에서 <카모메 식당>(2006)으로 시작된 슬로우 힐링 영화의 열풍이 본격적으로 한국에도 상륙할 것 같다. 원작 일본영화를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적 풍경과 상황, 한국 밥상을 효과적으로 영화에 담는다. 스토리라인 보다는 4계절의 변화를 카메라에 포착하고, 자연에 적응해가는 인물의 행동을 무심하게 따라간다. 그렇게 막바지에 도달한 후 뒤돌아보면, 어느새 훌쩍 성장한 주인공을 보게 된다. 

사계절을 예쁘게 담아낸 촬영, 우리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보여주는 황홀함,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청춘들의 관계, 강아지와 식물의 예쁜 모습이 주는 휴식과 위안에 한정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처절하게 깨지고 아픈 청춘의 문제를 개인 심리의 문제로 치환하는 오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잃어버린 야성이 있고, 그 야성을 회복할 작은 숲이 있다. 최악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폐허가 된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창조적인 야성을 어디에선가 일깨울 수 있다. 춥고, 덥고, 벌레가 창궐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선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농촌에서 주인공은 창조적인 열정을 회복한다. 이 주체적인 여성이 보여주는 끈질긴 회복력이 크나큰 위로를 준다. 단지 예쁘게 놀고, 맛있게 먹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상실과 실망, 그리고 좌절을 이겨내는 과정이 조금 더 치열하고 진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엄마의 품을 떠나 홀로 서서 심리적으로 성숙해가는 여성을 지켜보는 흐뭇함이 더했을 것이다. 농사를 짓는 과정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단순 치환이 아니라, 이 여성이 사회의 어려움을 뚫고 귀농을 선택하게 된 과정의 치열함이 표현되었다면, 그 지혜를 이 시대의 청춘이 함께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유배를 거친 후 방랑 끝에서 야성의 본능을 움켜쥐고 지혜를 터득한 멋진 여성 주인공이 주는 교훈이야말로 위로가 된다. 그러나 내 삶의 변혁은 나 혼자만의 심리적 변화로는 성취될 수 없다. 위축된 청춘들에게 진정 용기를 주기 위해서는 사적 세계로 몰입하는 나르시시즘적이고 탈정치적인 모나드 모델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꿰뚫는 지혜의 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영화 <와일드>(2014)를 쿨하고 멋진 성장영화, 여성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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