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

문사철대표

1971년 3월 28일 일본 나고야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미국 대표 팀은 단 한 종목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포츠에서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다른 분야에서 쌓았다. 대회가 끝난 뒤 15명의 선수단과 4명의 미국 기자들은 미국인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중국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면담을 갖고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돌며 중국 탁구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가졌다. 이를 가리켜 탁구의 영어 이름을 따 ‘핑퐁 외교’라 한다.

탁구 선수단에 이어 7월 9일 헨리 키신저 미국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그는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갖고 이듬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데 합의했다. 7월 15일 닉슨이 그 사실을 발표하자 전 세계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닉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1972년 2월 21일 예정대로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잇달아 만났다. 6·25전쟁에서 총부리를 맞대고 싸운 미국과 중국은 그렇게 친구가 되는 길로 들어섰다.

2018년 2월 9일 평창에서 동계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앞둔 한반도에서는 북핵으로 말미암아 일촉즉발의 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회의 성공은커녕 안전한 개최조차 불투명할 지경이었다. 그때 위기의 진원지인 평양에서 평창올림픽의 성공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겠다는 메시지가 왔다. 한국이 이에 호응하면서 남북한 문화 교류, 공동 입장, 공동 응원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여자 아이스하키 종목에서는 단일팀도 구성되었다.

북한 선수단은 그 단일팀을 포함해 이 대회에서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선수들은 스포츠에서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다른 분야에서 쌓았다. 그들의 뒤를 이어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내려와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한 달도 안 된 3월 5일 문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특사단이 평양에 들어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다음날 돌아온 특사단은 4월 말에 남북 정상이 만난다고 발표해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김정은의 메시지를 갖고 미국으로 간 한국 특사단은 9일 북미 정상회담이 5월 안으로 이루어진다는 핵폭탄급 뉴스를 터뜨렸다.

47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두 사건은 똑같은 패턴을 보인다. 두 적대 국가 사이에 스포츠 교류가 진행되고 이를 발판 삼아 실권을 가진 고위급 인사가 상대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 물론 47년 전의 핑퐁 외교는 성공했으나 빙판 위에서 시작된 이번 외교는 언제 미끄러질지 모를 만큼 아슬아슬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사건을 이어주는 하나의 고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1971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미국 짝사랑이다. 북한은 동맹국인 중국이 적국인 미국과 가까워지는 데 큰 위기감을 가졌다. 그러나 곧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도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미국은 북한의 접근을 번번이 외면했다. 한때 북미 수교가 임박한 것처럼 보인 적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는 것을 본 미국은 북한도 머지않았다는 판단 아래 대북 관계개선을 서두르지 않았다. 고립무원의 북한은 최후의 수단으로 핵무기 개발을 택했다. 냉담했던 미국을 마침내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인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을 협박하는 핵무기였다. 그리고 47년 만에 그토록 원하던 북미 관계 정상화의 문턱에 이르렀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47년 전과 지금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변수가 있다. 47년 전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사력을 다해 북미 접촉을 막았다. 반면 지금의 한국 정부는 앞장서서 북미 대화를 중재하고 있다. 이 변화가 효력을 발휘할지 여부가 한국의 달라진 국력과 국제적 위상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