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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전국을 손에 들고 다니다
  • 오시경 기자
  • 승인 2018.03.18 06:40
  • 호수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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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우리 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 신유본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등재됐다. 현재 대동여지도는 국내외 도서관과 박물관에 약 25점이 남아있다. 각 대동여지도는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도 소유자들이 직접 표지를 만들어 지도첩에 붙이기 때문에 지도마다 표지가 다른 경우가 많다. 목판으로 표지를 찍어낸 경우도 있지만, 직접 필사로 만든 표지도 있다. 우리 학교의 대동여지도의 경우 원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표지에 ‘대동도’라고 필사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지도의 제 1첩 일부가 필사본으로 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문화재 위원들은 ‘부산대학교가 소장한 대동여지도는 목판의 인쇄상태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며 ‘고산자 김정호가 직접 인쇄하고 펴낸 모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다’고 전했다.

대동여지도, 김정호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종 12)에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 간행한 분첩절첩식 전국지도첩이다. 대동여지도는 초간된 신유본과 재간된 갑자본이 존재한다. 대동여지도는 당시 활발했던 실학 연구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조선은 △농업 △수공업 △광업 등이 발달했고, 이로 인해 지역 간의 유통이 활발해져 실용적인 지도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또한 두 번의 전란을 겪으며 민생 안정과 외적 침입 대비가 시급했다. 때문에 군사적 차원에서도 국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군사 시설과 접경 지역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서양의 발달된 지도 기술을 접하면서 지리적 정보 공유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바탕으로 학자들의 지리적 연구는 활발해졌다. 또한 조선 후기가 되면서 사대부를 중심으로 일부 지도 소유가 가능해지면서 학자들뿐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지도 제작이 이뤄졌다. 

대동여지도는 전국 지도만 보여주는 지도첩이 아니다. 앞부분에 △지도를 만들게 된 이유가 적힌 ‘지도유설’ △지도에 쓰인 기호를 정리한 ‘지도표’ △조선의 주요 행동통계를 정리한‘ 팔도행정 통계’가 포함돼있다. 또한 ‘도성도’라는 당시 수도였던 한양을 자세히 그린 지도와 한양 중심부부터 성 밖 10리까지 한성부 구역을 보여주는 ‘경조오부’도 그려져 있다.

김정호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적을 부수고 폭도를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고, 평상시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용하도록’ 이라는 취지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중적인 지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동여지도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바로 김정호가 직접 전국을 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국을 돌며 직접 지도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김기혁(지리교육과) 교수는 “김정호는 여러 지도를 모아 편집하는 방식으로 지도를 만들었다”라며 “그는 뛰어난 편집자 였다고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대동여지도 제1첩에는 방격표가 있다. 방격표는 가로 8칸, 세로 12칸으로그려져,두지점간의거리와지도의축척을계산할수있 게 도와준다. 표 내부에는 매방십리(每方十里)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방격표의 한 칸이 10리라는 뜻이다. 당시 10리를 2.5cm로 축 소하여 표현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통일된 도량형 제도가 없어 서 정확한 축척 계산이 힘들지만, 조선 시대의 10리를 약 4km라고 본다면 축척은 약 160,000분의 1일이다. 대동여지도는 읍과 읍 사이도로를 나타낸 선에10리마다 눈금을 표시 하려 거리를 알 수있게 만들어졌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나누고, 동과 서를 80리 간격으로 나누어 한 면을 구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각 층을 병풍처럼 접어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자 하나 를 ‘첩’이라고 하며 대동여지도는 총 22첩으로 이뤄져있다. 일반 책처럼 제본된 이전의 지도들과 달리 첩을 펼쳐서 위아래를 연 결하여 볼 수 있는 점이 대동여지도의 장점이다. 사람들이 필요 한부분의지도만들고다니면서볼수있게된것이다.다접은지 도 한첩의 크기는 대략 가로 20cm, 세로 30cm로 당시 서책과 크 기가 비슷하다. 모든 첩을 이어붙인 지도의 크기는 약 가로 4.0m, 세로 6.6m에 달한다.

 

대동여지도는 대량 보급을 위해 목판으로 제작됐다. 목판의 크기 는 약 세로 43cm, 가로 30cm로 목판마다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대 동여지도의 판목 수는 총 126판으로, 목판 하나에 지도 2면에 해당 하는 부분이 새겨진다. 목판 양면에 판각되고 새겨지는 양이 많이 적을경우하나의판에여러판을새기기도했다.총사용된목판은 60장으로 추정된다. 목판에 지도를 새긴 이유는 대량 보급과 지도 필사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다. 목판본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정되고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때문에 신유본과 갑자 본에 새겨진 내용이 다르고 각각 신유본, 갑자본끼리도 내용이 다른 경우가 있다.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줄이는 대신에 오늘날 지도의 범례 에 해당하는 ‘지도표’를 고안해 내용을 기호화했다. 기하학적 도형 을 사용해 △관청 △성터 △봉수 △가구 등을 표시했다. 또한 산맥 을 선과 면으로 표현해 △산의 모양과 크기 △분수령 △하천 유역 을 알 수 있게 했다. 산맥을 이어 그린 점에서 우리나라 전통 자연 인식체계와 조상들의 풍수적 관념도 볼 수 있다. 물길은 단일 곡선 과 이중 곡선 2가지로 그려져 있다. 단일곡선은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을, 이중곡선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을 나타낸다. 지도를 보 고이동시,이용할이동수단을미리고려할수있도록한것이다.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모두를 위한 지도가 되다

대동여지도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하다고 볼 수 있다. 국토를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했으며, 실학을 기반으로 사회, 경제적 특성을 반영하려고 시도했다. 물론 현대 지도와 비교했을 때 한계점은 존재한다. 목판본으로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표시되는 지명들이 간소화되어 자세한 지도라고 보기 힘들다. 또한 삼각측량 기술이나 경위도 측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북부지방 지도에서 오차가 크게 나타난다. 

지명 표시가 간소화되었지만, 지도에 표기된 지명 수는 총 1만 3천 곳으로 당시 다른 지도보다 많은 편이었다.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당시에 행정적, 지리적 자료로써 뿐만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도 중요하게 사용됐다. 현재에 와서는 당시 조선 시대의 지역 구조를 이해하는 자료로 사용된다. 

예술성과 근대성 또한 대동여지도에서 두드러진다. 당대에 이어져 온 지도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법을 사용한 것이다. 글자로 내용을 표시하는 대신 기호로 지도에 내용을 담았으며 옛 지도를 근대화했다. 김기혁(지리교육학) 교수는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의 산맥을 끊지 않고 이어 그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를 지도에 담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의의는 지리적 정보를 많은 사람이 알 수 있게 했다는 것에 있다. 목판본으로 지도를 만듦으로써 보다 쉽게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시중에 지도가 보급되면서 목판을 빌릴 만큼 돈이 없는 경우에는 목판으로 찍은 지도를 보고 필사본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시작으로 지리적 정보가 국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오시경 기자  sunlight1105@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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