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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음악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다
  • 추예은 기자
  • 승인 2018.03.11 06:01
  • 호수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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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나는 윤이상입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 나의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내가 구라파에 체제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 색, 그 잔잔한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나한테는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윤이상. 그의 이름에는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화려한 수식이 붙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푸르른 바다와 떠다니는 조각배들, 귓전에 들리는 지역민들의 구성진 가락에 영감을 받고, 음악을 사랑했던 한 예술가가 있다. 모든 경계와 벽을 허물고 인간애와 평화를 노래한 그에게 고국은 정치색을 입혀 발길조차 들이지 못하게 했다. 49년의 긴 겨울이 지나간 봄, 드디어 그는 따스한 고향 땅에 다시 돌아왔다. 

통영 바다를 보며 꾸던작곡가의 꿈 

지리산 등성이 구름 속에 용 한 마리가 있었으나 높이 날아오르지 못했다. 상처 입은 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용’은 윤이상 작곡가의 태몽이었다. 1917년 9월 17일 태어난 그는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체험한 △오광대놀이 △무당굿 △어부들의 남도창 등 전통문화예술은 이후 그의 음악에 무한한 영감이 됐다. 13살 무렵, 그는 극장의 막간 연주회에서 자신이 최초로 작곡한 음악을  들은 후, 작곡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7살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서울로 가서 2년간 화성학을 배운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작곡 및 음악이론, 첼로를 익혔다. 
일본 유학 중 태평양 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그는 귀국했다. 통영의 작은 섬을 기지로 삼아 항일운동을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민족말살정책이 실시되던 당시, 자택에서 우리말로 쓰인 가곡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2개월 동안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탈출한 뒤 1945년 서울 병동에서 해방을 맞았다. 
통영과 부산에서 교편을 잡으며 생계를 이어갔던 윤이상은 틈틈이 작곡에 매진했다. 1년을 준비해 발표한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는 그에게 1955년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의 영예를 안겨줬다. 이는 유럽음악 기법과 작곡 공부에 대한 그의 열망을 현실화시켰다. 가족과 지인의 축복 속에 1956년, 그는 불혹의 나이에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떠났다. 서베를린음대 입학 후 12음 음악파 작곡가들인 ‘제2 빈학파’와 쇤베르크가 창안한 ‘12음 기법’은 그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하기 강습회를 통해 존 케이지와 같은 전위 급진적 작곡가들의 음악에 거리감을 느꼈다. 다양한 음을 변주해가는 서양 음악보다 하나의 주요음을 오래 이끌어가는 동양 음악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전통음악을 살려 서양 현대음악 기법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이는 이듬해 같은 음악제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과 가우데 아무스 재단 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발표하며 동양의 전통음악을 세련되게 표현한 작곡가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감옥도 가둘 수 없는 음악에의 열정 

윤이상은 유럽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로 일정 기간 더 체류하기로 결심했다. 체류 기간 동안 미국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아 안정된 환경에서 한국의 전통음악적 토대를 서양 현대음악기법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고유한 창작기법인 ‘주요음 기법’을 만들었다. 주요음 기법이란, 주요음인 각 개별음 내지 음군이 △앞꾸밈음 △진동 △글리산도 등 주변 음들의 꾸밈을 받아 음색을 변화시켜 작품의 핵심이 되는 작곡기법이다. 윤이상은 이처럼 우리나라 궁중음악의 주요음 원리를 근거해 서양의 현대음악 기법에 적용시켰다. 우리 학교 박용철(음악학) 교수는 “윤이상은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내재된 주요음을 현대음악 기법으로 표현한 작곡가”라며 “서양에서 인정받은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전통음악인 정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정신적·소재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윤이상은 자신의 주요음 기법에 동아시아의 도가사상의 본질적 요소가 구현됐다고 전했다. 즉 주요음이 울리는 순간부터 사라질 때까지 음양의 원리가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의 주요음 기법은 대편성 관현악곡인 <예악>에서 높은 완성도를 드러냈다. 이는 1966년 현대 음악가들이 선망하는 국제무대인 독일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발표돼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한편 그가 독일에서 작곡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67년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부정선거 시비를 덮을 요량으로 일명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간첩으로 몰린 194명의 문화예술인 중에 그도 속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대통령의 친서를 받으러 나오라는 전화에 꾀여 붙잡힌 후 서독에서 고문을 당했다.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자백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거쳐 한국의 남산 중앙정보부 본부로까지 끌려가서까지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극심한 고통과 모멸감을 느껴 유리 재떨이로 머리를 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2여 년간의 모진 수감생활에도 그의 삶 자체인 음악만은 놓지 않았다. 국가권력의 폭력성 아래 겪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그의 음악은 성숙해져 갔다. 간신히 교도소에서의 작곡이 허락되자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허위를 비판하는 희극 오페라 <나비의 꿈>을 창작했다. 이후 연이어 정보부의 감시 아래 실내악곡 <율>과 <영상>을 작곡했다. 훗날 윤이상은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했다”라고 회상했다. 
윤이상이 정치 모략으로 납치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 각국 정상들과 음악가들은 그를 풀어내기 위해 움직였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엘리어트 카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의 저명한 음악가 181명의 서명이 담긴 호소문이 한국에 전달됐다. 호소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대통령 각하, 윤이상 선생은 매우 뛰어난 음악가입니다. 그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수한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한국 음악의 뛰어난 전통을 서양 음악의 한 흐름과 이어주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과 인격자로서의 모습은 한국의 문화와 예술 외에 알리는 귀중한 전달자로서의 위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국제음악계는 윤 선생을 필요로 합니다. 부디 윤이상 선생에게 하루빨리 자유를 주시길 바랍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서독 정부의 외교적 압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윽고 1969년 그는 납치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독일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고향의 품

1969년 3월, 윤이상은 자유의 몸이 됐지만, 고국으로부터 추방된 처지였다. 서독에서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는 동안에도, 지난 시간은 후유증으로 남아 그를 괴롭혔다. 날마다 악몽을 꾸었고 고문으로 온몸이 아프기도 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감시를 끊어내고자 끝내 독일로 국적을 바꿨다. 그러나 연주회 프로그램마다 자신을 ‘한국의 작곡가’라고 표기할 만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었다.
1972년 독일은 그에게 뮌헨 올림픽 개막 축전 오페라를 작곡을 제의했다. 동서양의 문화를 화합하고 소통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심청전>을 완성했다. 상처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심청의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많은 찬사를 받으며 그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베를린에 정착하며 음악 세계도 변화했다. 그의 음악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만연한 폭력을 규탄하는 인간애의 호소로 나아갔다. 그는 나치 수용소에 있던 시인의 시 내지는 성경구절을 성악곡 가사로 사용했으며, 인간 중심의 음악을 위해 청중이 듣기 쉬운 기법으로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매년 하나씩 교향곡을 발표하며 평화를 기도했다. 
이러한 윤이상의 인간애적 시선이 주로 머문 곳은 고국의 정치·사회 현실이었다. 그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목격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에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한 칸타타인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는 우리나라 민족주의 시인의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 그의 마지막 악곡 중 하나인 <화염 속의 천사>는 1991년 한국 정권의 반독재 투쟁의 탄압으로 분신자살한 대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노년에 이르자 그는 우리나라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자유인으로 고국의 땅을 밟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당시 김영삼 정부는 준법서약서를 쓰면 귀국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정치적 항복을 담은 내용이었다. 그는 과거와 결코 달라지지 않은 정부의 태도에 침통함을 느끼고 이를 거부했다. 고국을 방문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병세가 완연한 몸을 이끌고 일본에서 남해안 근처까지 배를 타고 갔다. 고향 통영을 멀찍이 바라보다 돌아오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 없습니다"

1995년 11월 3일 윤이상은 독일 베를린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뉘어졌다. 고국이 그리워 자택 마당에 한반도 형상의 연못을 만들고, 평생 침대 머리맡에 1960년대 고향 통영 정경의 사진을 두었던 그였다. 그러나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던 유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 영영 그렇게 이뤄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난달 25일, 고향을 떠난 지 49년 만에 그는 고향에 돌아왔다. 이전부터 통영시청과 유족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이장 요청을 해왔고, 올해 윤이상의 부인인 이수자 여사가 친필편지를 베를린시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법적으로 20년이 지나 이장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를 승낙했다. 이에 지난달 23일 유골함은 베를린 묘지에서 25일 통영시 추모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오는 30일 2018 통영국제음악제(TIMF) 개막일에 맞춰 인근 언덕 묘지에 정식 이장된다.
윤이상의 귀향은 통영시는 물론 우리나라에도 뜻깊은 일이라 평가되고 있다. 통영시 윤이상 기념관 이중도 팀장은 “이 일은 어쩌면 국가폭력의 무고한 희생자였던 그에게 정당한 대우”라며 “통영이 세계적인 음악도시라 자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독재체제를 극복하고 개인의 소망과 인권이 실현됨으로써 높아진 국격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전했다.

추예은 기자  miin2030@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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