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 K씨는 남편에게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신체적 건강은 금세 회복됐지만 마음의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당시 범죄피해자 지원을 담당하는 검찰이 K씨에게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권유했다. 

검사 결과, K씨의 뇌에 이상 부위가 발견됐다. 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전두엽이 손상된 것이다. 그 부위의 혈액순환도 원활하지 않았다. 전전두엽은 다른 영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연결하는 ‘두뇌의 사령탑’으로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부위가 손상되면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기능이 떨어진다. 

2015년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 윤수정 교수팀은 강력범죄 피해자 60명의 뇌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해 상당수 피해자의 뇌 구조가 물리적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피해를 입은 지 오래되지 않을수록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돼 있었다. 장기 기억과 공간 개념, 감정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기관인 해마에 딸린 편도체는 정서적인 반응, 특히 공포에 반응하는 부위다. 

흔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범죄, 전쟁피해, 성범죄, 재해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뒤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이다. 정신적 외상이란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PTSD는 뇌에서 공포 반응을 주관하는 편도체와 관련이 있다. 최근 뇌과학에서는 어느 한 부위가 활성화돼서 특정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위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1994년에 간행된 미국 정신의학의 공식 진단체계인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Ⅳ)에 따르면, 교통사고, 폭행 사건처럼 비교적 가볍고 빈번한 사건들에 의해서도 PTSD가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됐다.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로도 마음의 건강을 호되게 잃을 수 있는 셈이다.

2017년 10월 미국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및 성희롱 행위를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서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운동’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아픔을 짓누르며 고통받던 피해자들이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PTSD 환자들의 뇌 영상과 혈액 샘플 등을 장기간 분석하면, 범죄로 인해 뇌에 생긴 이상을 진단할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만약 뇌 연결망이 변화해 PTSD가 일어났다면, 피해자의 PTSD 증상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PTDS로 발전하기 전 단계인 ‘외상후 증후군’(PTS)을 보이는 피해자를 찾아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PTS 증상은 특정한 상황에서 가슴이 뛰면서 호흡이 빨라지고 땀이 나는 등 PTSD와 증상은 비슷하지만 가볍고 오래 지속되지 않아 피해자도 일상의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다.

또 강력범죄가 피해자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과관계를 규명되면, 법원에서 가해자의 유죄 판결과 형량을 결정하는 데 뇌 영상과 혈액샘플이 활용될 전망이다. 팔이 부러지거나 피가 나는 외상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재판 결과에 핵심증거로 채택되고 있다.

반면 PTSD처럼 뇌에 생긴 문제는 피해 정도를 가늠하는 증거로 채택되기 어렵다. 그런데 X레이 촬영으로 뼈의 골절을 진단하는 것처럼 성폭력이나 성희롱 행위 등으로 인한 피해 정도를 밝혀낼 수 있다면 어떨까? 법정에서 피해 정도에 따라 가해자의 형량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심리상태  를 모니터링하고 기분전환을 유도하는 어플리케이션 ‘보드미’가 등장했다. 아직은 피해자의 PTDS 증상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단계다. 우리 사회의 미투운동은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응원할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미투운동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 피해자의 상처가 무엇이며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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