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 개론>(2012)에서 승민(이제훈 분)은 건축학 관련 교양 강의 시간에 알게 된 서연(수지 분)에게 사랑을 느낀다. 단순히 짝사랑이 아니라 어느 정도 둘 사이에 사랑이 익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해하게 된 승민이 서연에게 차마 못할 모욕을 주며 떠난다. 그 오해는 선배의 방에 서연이 들어갔던 것. 그것도 부잣집 선배의 방에 밤에 들어간 모습을 보고 승민은 자학했다.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부잣집 아들이라는 사회경제적 권력의 선배 집이나 드나드는, 그러니까 조건 따지는 헤픈 나쁜 여자로 만든 셈이다. 그런 승민이 찌질하게 보였다. 결국 여성의 책임으로 귀결시키는 행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영화는 또 있다. 영화 <우리 선희>에서 주인공 선희(정유미 분)는 선배와 동기, 교수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여성으로 그려졌다. 교수나 학생이나 남자들은 모두 선희에 대해 연정을 품었다. 그 모습 자체가 유쾌하게 볼 수는 없었다. 이 영화도 <건축학 개론>과 같이 역시 현실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건축학 개론>의 서연이나 <우리 선희>에서 선희가 현실에 있다면 미투 운동의 주체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캠퍼스 생활을 실제로 했다면 성추행이나 성희롱, 폭력에 시달렸을 것이다. 두 영화가 조건을 보고 결혼하고, 자기 잇속만을 챙긴 여성으로 그리고 만 것은 바로 그 영화를 만든 이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건을 보고 결혼한 서연이가 이혼을 당하고 다시 첫사랑 승민을 찾아온 것은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겠다. 정작 승민은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을 하고 해외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니까 말이다. 더 심한 남성의 욕망이 깃든 영화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2011)에서는 여자 제자(오인혜 분)와 대학교수(조선묵 분)의 불륜이 그려진다. 더구나 남자 교수는 여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는다. 이는 실제 얼마 전 있었던 실제 시사만화가의 사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영화의 내용이 실제라면 그 실제 주인공은 교수에게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을지 모른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성과 여성의 사랑은 영화와 소설 등에서 너무 쉽게 미화되거나 낭만적으로 그려져 왔다. 철저히 나이 많은 남성의 입장에서 말이다.

근본적으로 대학가의 성추행과 성폭력은 대상화와 사물화에 있다. 학생으로 보지 않고 다른 성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혹 학생으로 봐도 왜곡된 나이 어린 자로 간주한다. 아무리 제자라거나 후배라고 해도 그들의 몸까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몸에 대한 문제 이전에 의식과 가치관의 문제다. 옛말에 유가(儒家)에서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다. 이는 뒷세대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갖는 태도를 말한다. 후배이거나 학생을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고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권적 존재이면서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도 어린 동자승은 광야를 태울 불씨라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지금은 미약해도 소중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대학원생의 경우에도 단지 학생이거나 조력자가 아니라 미래의 동료이자 스승이 될 사람들로 여겨야 한다. 무엇보다 학교는 학생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학교가 있기 때문에 교사가 있고 교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녀야 한다. 미투운동은 단지  권력 지배에 따른 성과 젠더 뿐만 아니라 이런 가치관의 올바른 자리매김이 근본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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