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고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작가, 출판사, 표지, 누군가의 추천, 신문기사나 리뷰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책을 선정한다. 위의 방법과 함께 내가 책을 정하는 방법은 ‘첫 문장’을 읽는 것이다. 서점, 도서관에서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본다. 신생 출판사나 무명의 작가, 혹은 표지가 오래되고 낡은 책이어도 상관없다. 어느 책이든 한 권을 꺼내, 첫 문장을 읽어본다. 그렇게 읽은 첫 문장이 눈길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책과의 인연을 이어나간다. 마치 정보 없이 나간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내게는 그렇게 눈길을 끈 첫 문장이 몇 개 있다. 최근 읽은 김이설의 소설 <경년(更年)>은 “음모에도 새치가 난다는 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까”로 시작한다. 파격적으로 시작하는 문장에 놀라 제목을 다시 보니 ‘경년(更年)’이다. 고칠 경, 다시 갱으로 읽히는 경(更)을 제목으로 한 이 소설은 갱년기를 맞이한 여성과 사춘기 아들의 복잡한 내면상태와 여러 가지 갈등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제목과 함께 첫 문장에서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추측할 수 있었다.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 들 때>의 첫 문장은 한 때 외우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던 문장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전부였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위 문장에 나오는 타자기와 뭉크화집, 턴테이블을 주인공 아담 못지않게 가지고 싶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멜로디가 담긴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연결한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으로 한 채,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기계식 타자기로 나만의 글을 쓴다. 그러다가 글이 안 써질 때면, 두 손을 뺨에 대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뭉크의 그림들을 들춰본다. 열아홉, 스물의 나이가 주는 불안전함이 턴테이블, 타자기, 뭉크화집이 주는 적당히 감각적이면서도 황폐하고 퇴폐적인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부조리함 역시, 당시의 나와 비슷하다고 여겼던 듯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은 <아담이 눈 뜰 때>는 전형적인 남성시각의 성장소설이라 읽는 내내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말이다.

잊지 못할 첫 문장도 있다. 10년쯤 전, 일본의 에치코유자와로 겨울여행을 떠났었다. 그곳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이 전에도 소설을 읽었지만, 여행을 앞두고 소설을 다시 꺼내 천천히 읽었었다. 그리고 소설집을 여행가방에 넣어 그곳으로 출발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정말로, 내가 탄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자 새하얀 ‘설국’이 펼쳐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5년부터 1947년까지 쓴 소설의 무대는 2007년에도 생생히 살아서 펄떡대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과 완벽하게 똑같은, 니카타현 쓰치바루역을 보면서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장이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던져져 있었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있을 것이다. 첫 문장일 수도 있고, 마지막 문장일 수도 있으며, 소설의 중반부나, 갈등의 최고조에서 어떤 문장과 만날 수도 있다. 그 문장들의 공통점이란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문장을, 이번 봄에는 내가 직접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소설가들의 문장처럼 멋지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내 마음에 드는 문장, 지금의 내 심정을 적확하게 표현한 문장, 내 모습을 담고 있는 진실된 문장을 말이다. 3월, 입학, 새 학기, 새로운 사람, 그리고 봄의 시작이야말로 나만의 ‘첫 문장’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들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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