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올림픽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미투 운동’의 열기가 거세다. 한 영역에서 정상의 자리에 있던 남자들, 많은 사람의 지지와 존경을 받던 남자들이 연일 미투 직격탄을 맞고 쓰러지고 있다. 그런 정상의 자리, 지지와 존경을 잘못 이용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한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대가로 권력을 잃고, 심지어 나라가 뒤바뀐 이야기는 역사 속에 적지 않다. 헬레네를 납치해 간 파리스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 트로이가 멸망하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또한 기원전 509년에 타르퀴니우스 왕자가 루크레티아라는 여성을 성폭행하고 그녀가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린 뒤 자결하자, 분노의 봉기가 일어나 왕정 자체가 타도되고 로마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710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던 서고트 왕국의 로데리크 왕이 플로린다 라는 소녀를 성폭행했는데, 이에 분노한 플로린다의 아버지 줄리앙이 바다 건너의 무슬림들을 끌어들여 왕에게 반역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의 땅이 된다. 그리고 1642년에는 북경에 두고 온 애첩 진원원이 이자성에게 능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열어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진위 여부도 미심쩍고, ‘내 여자’를 빼앗긴 남자가 상대 남자에게 복수한다는 구조여서 지금의 미투 운동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스스로를 위해 그 사실을 폭로하고 상대 남자를 고발한 사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찾아볼 수 있는데, 1942년에 에롤 플린이라는 미남 배우에게 성폭행당한 10대 소녀들인 베티 한센과 페기 새털리는 힘을 합쳐 플린을 고발했다. 그러나 법정은 플린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소녀들이 옷을 야하게 입고 있었다’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심지어 ‘법정에서 눈물 한 방울 없이 당시 일을 설명하는 걸 보니 본래 정조관념이 없는 여자들이다’ 따위의 근거 때문이었다.

에롤 플린은 계속 영화를 찍으며 편안하게 살았으나, 몇 년 뒤에는 ‘헐리웃이라는 곳이, 영화계라는 데가 얼마나 썩고 남성 중심적인지를’ 인기 여배우 모린 오하라가 고발해 미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그녀는 1945년 <데일리미러>의 인터뷰에서 ‘영화 촬영을 할 때마다 성추행을 당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고 밝혔다. 그녀의 폭로에 용기를 얻은 여성들이 속속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고발하여, 여러 스타와 정치인들을 영광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꽁꽁 숨기고, 미투 운동이 일상적이지 않고 특별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그 사실을 공개하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에롤 플린의 사례를 보듯, 사회가 도리어 가해자인 남성의 편에 서서 피해 여성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런 사례가 있어서 씁쓸하게 한다. 임복비라고 하는 여성은 이복 오빠뻘인 임어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까지 했다. 그런데 그녀와 정혼했던 남자가 시집도 오기 전에 임신했음을 알고 관아에 고발했는데, 임복비는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두고 어전에서는 논란이 벌어졌고, 당시의 임금(바로 세종이었다)은 임복비를 살려주고자 했으나 ‘어찌 됐든 외간남자와 관계한 아녀자를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밀려 결국 임복비를 처형하고 말았다. 세종 18년(1436년) 8월 22일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미투’는 다른 나라의 미투와 조금 다르다고 한다. 피해 여성이 공개적으로 언론에 나와 폭로하는 일도 있지만, 익명을 쓰거나 가해자의 실명을 완전히 적시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명예훼손죄를 우려한 때문도 있겠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을 밝히면 피해 여성이 손해 본다’는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미투 운동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면 남성 위주의 문화를 보다 근본적으로 고쳐 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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