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나는 이 지면을 통해 한 작가의 단편소설을 소개했다. 2016년 <작가와 사회> 봄호에 실린 정태규 소설가의 <갈증> 말이다. 이 지면에 소개한 여타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소설은 당시에 내가 읽은 인상 깊은 소설이었고,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엔 아쉬운 작품이었다. 한국소설 독자가 날로 줄어가는 상황에서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단 한 명이라도 소개된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태규 소설가의 소설에 눈길이 더 머문 건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작품을 쓴 작가의 환경이 일반적인 작가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작가가 안구 마우스를 이용해서 완성한 글이었다. 작가와의 일련의 만남, 소설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 글을 마무리했었다.

‘그는 소설 제목과 같이, 여전히 소설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소설가가 아닌가.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2017년 가을, 그는 내 기대에 응답을 해 주었다. 그것도 단편소설이 아니라 묵직한 분량의 책으로 말이다.

정태규 소설가의 책 <당신은 모를 것이다>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이후 안구의 움직임과 눈 깜박임으로 작동하는 안구 마우스를 이용해 쓴 병상 에세이들이다. 2부는 구술과 안구 마우스를 이용해 쓴 소설 2편과 기발표 소설 1편, 3부는 기존에 발표한 에세이와 새로 쓴 에세이를 정리해서 묶었다.

책을 앞에 두고 표지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책장을 넘겨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 궁금함과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모르는 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하얀 표지와 추천사가 적힌 뒷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넘기다 책장을 넘겼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 병상 일기는 외려 따뜻하고 다정했다. 자신의 병에 대한 원망이나 좌절, 푸념보다는 남은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더 빛나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주변 지인들을 아끼고 챙기는 마음 또한 엿볼 수 있었다. 단단하고 진중한 문장은 마치 연필을 손에 쥐고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쓴 것 마냥 힘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부분은 소설가로서의 다짐, 열망이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그는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나왔다)였던 작가는 이제서야 소원하던 ‘전업 작가’가 되었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세 번째 소설집을 발간하며, 지금까지 쓴 작가론과 평론을 모아 평론집을 내고, 그동안 못 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신이 내게 정신과 육체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정신을 선택할 것이다. 내 정신이 곧 내 소설이고, 소설을 쓸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는 육체에 몸은 갇혀 있지만, 그의 소설가로서의 다짐과 열정은 이제 막 등단한 신인 작가 못지않게 반짝였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온몸의 시학’에서 시쓰기란 머리나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김수영의 시학론을 정태규 소설가의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그의 소설 쓰기야말로 김수영이 말한 ‘온몸의 글쓰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제 자신을 전부 던져 쓰는 소설, 소설을 통해 어떤 권력이나 명예, 힘이나 상을 바라지 않는, 소설 자체를 위한 소설 쓰기. 그의 소설이야말로 이제껏 그 누구도 쓸 수 없던, 쓰지 못했던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번 글도 작년 글의 마지막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음하려 한다. 나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이것은 정태규 소설가의 독자이자 후배작가의 간절한 바람이다.

오선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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