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조합원 대표들이 천도교기념강당에 모였다. 모두 숨죽인 순간, 결의에 찬 목소리가 강당 내부를 울렸다. “지주, 고리대금업자, 금융조합 등의 철쇄 아래 신음하고 땅을 잃고 쫓기여 다닌 농민의 비참은 말할 수 없다. 이 해결을 위해 나온 것이 농민조합이다!” 광복 이후인 1945년 12월 8일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하 전농)’이 결성된 날이다.
 
광복이 되던 날부터 농민들은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며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를 냈다. 대다수의 민중이 농민이었던 일제강점기, 이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농민의 70%는 소작농이었으며 그중에서도 65.3%는 최저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토지에서 경작하는 실정이었다. 이들은 살기 위해 광복을 기회 삼아 사회·경제의 변혁을 일으키고자 했고, 이러한 움직임으로서 농민조직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농민운동은 갈수록 고조돼갔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각지에서 개별로 활동을 하니 단일한 힘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결국 준비위원회를 거쳐 전농을 결성했다. 약 330만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전농은 당시 농민 거의 전부가 소속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전농은 농민 생활의 적폐를 중점으로 개혁해 나가고자 했다. 이들이 내건 당면과제는 △3:7제 소작료 운동 △토지개혁 △미군정의 양곡 수집령 반대였다. ‘3:7제 소작료 운동’과 ‘토지개혁’은 전체 토지의 10%에 해당하는 일본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 토지에서 경작하는 소작농일 경우 수확량의 30%만 내도록 했다. 수확량의 50%를 납부하던 일제강점기 때와 달리 소작료를 낮추어 농민들의 생계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일제의 공출제도와 유사한 ‘미군정의 양곡 수집령’에 농민들은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전농의 진보적인 움직임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차츰 사그라들었다. 해방 이후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전농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을 것으로 여겨 세력 견제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전농은 이듬해인 1946년 ‘10월 항쟁’이 일어나며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 
 
이렇듯 전농은 농민에게 직결되는 문제들을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던 조직으로 평가된다. 송승현(사학 석사 17) 씨는 <1946~1948년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농민생활 개선운동 및 정치활동>에서 ‘이러한 전농의 활동은 농민 중심의 생존권 투쟁이자 토지모순을 비롯한 당시의 사회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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