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고통 속에서 보냈지만, 종지부를 찍는 것조차 괴로웠을 테다. 기다림은 결실을 맺지 못했고,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들의 장례가 치러졌다. 유가족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을 가슴에 묻고 목포신항만을 떠났다. 이들은 1,300여 일 동안 가족을 잃어야 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며 노숙도, 단식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체장사’ 아니냐는,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시신이나마 돌아오게 해달라는 요구는 이기심으로 치환됐고, 수색이 시작된 후에는 날이 갈수록 더 큰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국민을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이들의 말이, 그래서 더 아팠다. 그리고 그 고통의 무게만큼이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은 등굣길 버스 안에서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강의에 지각한 탓에 점심때가 돼서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었다. 쏟아지는 보도에 귀 기울였지만 ‘사실’은 실시간으로 뒤바뀌었다. 수많은 오보가 정정된 끝에야 305명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걸 확인했다. 나름 ‘편집국장’이었기에 사태가 흘러가는 과정에 격노했고, 일 년 내내 정부와 언론을 비판했다. 으레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데 거기까지였다. 관련 기사와 칼럼을 내놓은 뒤에는 점점 무관심해졌다. ‘한번쯤 현장을 방문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던 선배의 조언을 ‘현실적인 문제’ 운운하며 그저 웃어넘기기도 했다. 딱 그뿐인 일이었다.

임기가 끝난 뒤에도 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해결된 것 하나 없었고, 되려 물음표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더욱 무뎌져갔다. 그 즘이었다. 모두가 안타까워했던 당시와는 달리, 정치적 공방이나 설전이 오가기 시작했다. 와중에 ‘왜 기억해야 하냐’는 질문이 나돌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 메마른 질문에 당연하다 답했지만, 필자는 망설였다. 그리고 쉬이 답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며, 문득 그간의 행동이 의무감이나 사명감 따위로 포장된 위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저 방관자일 뿐이었다. 탐욕과 권력, 이기심의 무게를 방관했고, 이를 견디지 못해 가라앉아야만 했던 수백의 목숨도 방관했고, 가족을 잃은 슬픔과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아파했던 이들도 방관했다.

되돌아보니 어쭙잖았고, 마냥 부끄러웠다. 그래서 노란 리본을 하나 장만했다.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되새기기 위해, 무뎌져가는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게 직책을 떼놓은 오롯한 내가 세월호를 마주하는 방법이고, 1,300여 일 동안 싸움을 이어왔던 이들을 위로하는 방법이며, 또 부끄러움을 삭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의 외롭고 처절했던 싸움은 어쩌면 우리가 겪어야 했을 일일지도 모르기에.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 기억해 달라’고 외치던 이들이, 이제는 부디 안녕하기를 바란다.

진상규명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고, 죄 지은 이들은 여태껏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망각을 누린 어떤 이들은 이 시간에도 ‘지겹다’고 지껄이고 있다. 잊지 않겠노라 또 한 번 되뇌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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