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마포구에서는 특이한 몸싸움과 격한 설전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다며 박정희 동상을 세우려는 쪽과, ‘친일파 독재자의 동상이 웬 말이냐’며 결사반대한다는 쪽이 충돌한 것이다.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나누기도 한다는 오늘날, 그를 역겨워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떠받들고 그리워하는 사람들 역시 많다.

박정희를 떠받드는 사람들도 그가 독재자였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선의의 독재’를 했다고 한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를 경제 강국으로 붙들어 일으키려면 통상적인 민주주의로는 불가능했으며, 독재적 리더십과 밀어붙이기식 정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룩했다는 경제성장이란 허상이다, 아니 적어도 그만큼의 폐해와 부작용 또한 남긴 ‘절반의 성장’이다, 라는 비판도 ‘청렴하고 애국적인 지도자’라는 그의 후광을 쉽게 걷어내지는 못한다.

독재를 겪은 사람들이 그 독재자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일은 세계사에서 드물지 않다. 기원후 68년,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네로가 반란군에게 쫓기다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때, 의외로 그를 위해 애도하는 로마 시민들이 많았다. 그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지 않았으며, 마치 네로가 아직 살아서 통치하기라도 하듯 네로의 이름을 공문서에 쓰는 경우도 있었다. 네로가 온갖 위법과 기행으로 로마의 지도층에게는 인심을 잃었지만,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낫게 해주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기행으로 말하면 11세기 초에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로 군림했던 알 하킴도 만만치 않다. 그는 백성들이 어떤 음식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그 음식을 일체 금지했다. 그냥 금지했을 뿐 아니라 재고를 나일강에 남김없이 쏟아버리라고도 했다. 또 여성의 외출을 금지하고, 그 금지를 확실히 하고자 여성용 신발을 모조리 압수하고는 절대 새로 만들지 못하게 했다. 기독교도를 유난히 박해해서 대부분의 기독교도가 이집트를 떠날 지경이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박해를 해제하고는 무너뜨린 교회를 다시 세우고, 재산도 돌려주었다. 그런 그가 1021년에 돌연 실종되자, 암살이 뻔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는 승천했으며,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칼리프가 되리라’며 그의 초상 앞에서 꾸준히 기도를 드렸다.

독재자에 대한 향수는 그 후계자를 자처하는 정치꾼들에게 이용되기도 한다. 별 공로도 없고 재능도 없는 한량이었음에도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향수를 이용해 1848년에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고, 얼마 후 황제 자리에까지 앉은 루이 나폴레옹이 대표적 예다. 현대에도 포퓰리즘 독재자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은 1955년에 정권을 잃고 추방당했으나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 덕분에 1973년에 재집권했다. 그리고 1년 만에 그가 죽자 아내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넘겨받아 집권을 이어갔다. 또한 이탈리아의 독재자로 히틀러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무솔리니의 손녀인 알레산드라도 ‘우리 할아버지는 위대했다’는 메시지를 반복하며 여러 차례 국회의원이 되었고, 한때 총리 물망에도 올랐다.

왜 독재자가 추앙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까닭도 있다. 독재자를 추종했던 인물들이 여전히 사회 각계에서 힘을 쓰면서, 그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 빛나는 면을 과장해 신화로 만드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더 큰 까닭은 지금의 정치가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고, ‘이 사람은 좀 낫겠지’ 하고 뽑아 놨더니 ‘아니올시다’ 일 때, ‘차라리 OOO때가 좋았어’라는 의식이 퍼지는 것이다. 박정희만 해도 그가 죽고 한 10년 정도는 좋은 평가가 없었다. 그러나 생전의 그와 맞섰던 야당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고 난 뒤 경제성과 사회개혁 등이 기대에 못 미칠 뿐 아니라, 친인척 비리까지 드러나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박정희가 나았다’는 의식이 고개를 든 것이다. 결국 독재의 그림자를 역사 속으로 고이 보내는 지름길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길일 수밖에 없다.

서울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