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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 영화와 함께 했던 그, 김지석
  • 곽령은, 추예은 기자
  • 승인 2017.10.29 05:15
  • 호수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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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취재원 제공

‘In Loving Memory of KIMJiSeok’. 지난 21일 폐막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모든 영화 상영 전 이 메시지가 삽입됐다. 지난 5월 18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창립될 때부터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성장하기까지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던 김지석. 그가 영화와 함께했던 삶을 돌아봤다.

머릿속엔 온통 영화뿐이었던 학생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남포동 극장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런 주위환경 때문인지 영화에 관심을 갖고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돌아다니며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사 모았다. 배정고등학교의 ‘영화광’으로 불렸던 그는 영화에 관심이 많은 동인고등학교의 오석근 감독을 처음 만났다. “1895를 아냐?”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가 오석근 감독에게 건넨 첫마디다. 1895는 프랑스 사람이 영화를 만든 연도, 즉 영화가 탄생한 연도다. 오석근 감독은 그때를 회상하며 “영화 배틀에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졌다”며 “영화에 관해 얘기하려면 영화의 기원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졸업 후 그는 성적에 맞춰 우리 학교 기계공학부에 진학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영화학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전공공부보다 열심히 한 것은 ‘영화연구회’ 동아리 활동이었다. <씨네21> 주성철 편집장은 칼럼에서 ‘변변한 영화개론서 하나 없고 개인용 컴퓨터도 보기 힘들었던 1980년대에 영화용어와 개념들을 손으로 직접 써서 정리한 프린트물을 제작해 영화 수업 교재로 썼다’라고 언급했다. ‘영화연구회’ 활동으로 오석근 감독과 재회했다. 각자의 대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회장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두 ‘영화광’은 프랑스문화원과 극장을 드나들면서 친해졌다. 오석근 감독과는 이후 부산 최초 영화모임 ‘씨네클럽’을 결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프랑스문화원은 프랑스 영화를 한국인에게 알리고 전파하는 곳이었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프랑스문화원에서 당시 경성대학교 교수였던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조직위원회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만남으로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전문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됐다. 영화비평문을 싣는 매체가 부족했던 시절 함께 계간 영화평론지 <영화 언어>를 발간했다. 또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권유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인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도 국제영화제 할 수 있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해외영화제를 다녀오고 나서 우리나라에 국제영화제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그는 생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가까운 해외영화제를 간 것이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야말로 신천지였다”며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영화, 책에서나 보던 걸작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사가 우리나라에는 왜 없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사비를 털어 해외영화제를 다니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틈만 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도 국제영화제 할 수 있다’, ‘국제영화제 만들자’는 얘기를 꺼냈다. 90년대 초 그와 홍콩영화제를 함께 갔던 부국제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은 “저렴한 숙소에 묵어 벌레가 나와서 할 수 없이 깨어있는데, 어김없이 영화제 얘기를 꺼냈다”며 “‘과연 만들 수가 있을까, 지금 이런 비 새는 여인숙에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포기하지 않고 영화제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평소 뜻이 통했던 사람들을 모으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김동호 △이용관 △전양준 △박광수 △오석근 △김지석까지 부국제 창립멤버 6인이 모이게 됐다. 그러나 국제영화제를 창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경제적, 인력 등의 문제에 부딪혔다. 수중에 당장 돈이 없어 사무국을 운영할 돈조차 없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결혼 자금이었던 500만 원을 선뜻 내놓았다. 그 돈으로 책상을 사고 컴퓨터를 사고 운영을 하는 데 사용했다. 그 외의 창립멤버 모두 개최를 위해 헌신했다. 재정난을 자비로 메꾸고,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몸무게가 10kg씩 빠지기도 했다. 1996년, 이들의 열정이 드디어 꽃피었다. 부국제가 처음 개최된 것이다. 개최 전 충무로가 아닌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에 사람이 오겠냐는 우려를 꺾고, 18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성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6년 개최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기자회견장에 문정수 전 부산시장과 부산국제영화제 창립멤버가 앉아있다(왼쪽에서부터 차례로 △박광수 △김동호 △문정수 △김지석 △전양준) / 사진 취재원 제공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하류>의 출연진과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가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 취재원 제공

영화제 곳곳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부국제에서 아시아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 2007년 이후로는 수석 프로그래머로 활약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영화감독과 작품에 주목했다. 작품성을 인정받게 해주고 다음 영화 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준 것이다. 실제로 지금 국제적 명성을 얻은 아프가니스탄의 시디그 바르막 감독을 발굴하고, 모스토파 파루키의 <텔레비전>을 부국제 폐막작으로 선정해 방글라데시영화가 세계의 이목을 끌게 해주었다. 이 때문에 많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그에게 작품을 보내고 만남을 요청했다. 쏟아지는 출품작으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1년에 대략 800편의 영화를 봤는데, 그는 단 한 편도 소홀히여기지 않았다. 모든 영화에 코멘트를 다 남겨 그들이 어떤 점에서 부족했는지를 알려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애정은 부국제를 아시아 영화에서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시켰다. 부국제가 서양의 영화인들이 아시아 영화를 발견하는 통로로 만든 것이다. 강소원 영화평론가는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현재 전 세계의 거장인 아시아 감독들이 주목받지 못하던 시절, 세상이 몰랐던 영화를 발굴했다”며 “그는 아시아 영화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라고 전했다.

승승장구하던 부국제가 역경을 맞게 된 것은 2014년 다이빙벨 상영 논란이 있고 나서부터다. 외압논란과 영화 관련 단체들의 보이콧이 이어졌다. 창설멤버였던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위원장 자리에서 해촉되고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도 영화제를 떠났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영화’와 ‘영화제’밖에 몰랐던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부국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힘썼다. 영화제를 떠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는 떠나지 않았다. 부집행위원장 자리에 올라 영화제를 지켰다. 그의 갑작스러운 타계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 5월 18일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칸영화제 출장 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여전히 부국제에 남아있다. ‘In Loving Memory of KIMJiSeok’.

곽령은, 추예은 기자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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