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1929년 11월 3일(음력 10월 3일)에 두 가지의 선택지를 받았다. 양력으로는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기념하는 명치절이지만 음력으로는 고조선이 건국된 개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광주 학생들은 천황을 위해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가를 부르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일제강점기이던 1920년대 조선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등교 및 수업을 거부하며 동맹휴학의 형태로 항일 행동을 취했다. 그들은 1921년부터 1929년까지 한 해 평균 56건의 동맹휴학을 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조선 학생들의 항일 의식에 불을 지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시작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열차 안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를 비롯한 조선 학생들과 광주중학교 3학년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 학생들 간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후쿠다 슈조가 박준채의 사촌 누나인 박기옥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일에 기인한 것이다. 박준채를 연행한 경찰의 한마디는 광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선 학생인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 그러니 네가 사과해라”

3일 후 일본 메이지 천황의 생일에 △광주고보 △공주농업 △광주사범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시위와 행진을 단행하고 나섰다. 광주고보 학생 중 일부는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기도 했다. 3일 전 패싸움을 일본 학생의 편에서 기사를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해당 시위와 관련된 일간 신문 보도를 금지했다. 언론을 통제해 학생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이 그동안 삭혀왔던 항일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결국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간 패싸움은 1930년 3월까지 전국 학생들의 동맹휴학이나 시위로 확장됐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은 학생이 주도적으로 일제에 저항한 사건이다. 더욱이 신간회와 같은 규모 있는 항일단체들이 그들을 후원했다는 점에 있어 그 의미는 단순히 학생운동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광주항일학생운동은 일본정부에게 ‘제2의 3·1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 외무성 자료를 처음으로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장우권(전남대 문헌정보학) 교수는 <제2의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이 문서는 일본 외무성이 정리해 본토의 주요 기관들과 공유한 문서’라며 ‘당시 일본이 광주학생운동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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