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나마 ‘정치에 관심 있는 친구’로 분류됐다.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는 이력 때문이다. 덕분에 질문세례를 받곤 하는데, 마냥 난감할 뿐이다. 특히 정답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그중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정확히 무어냐는 물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접하는 우리 세대는, 정치 이념을 ‘수꼴’과 ‘좌빨’로 양분하려는 경향이 꽤나 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념을 세분화해가며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니 워낙 무지하고, 극단적인 대립 구도의 틀을 깨줄 수 있을 만큼의 설득력도 지니지 못했기에 입을 떼는 것조차 민망할 뿐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을 살짝이라도 드러냈다가 어느 한쪽으로 몰리게 될까 겁나기도 했다.

사실 사석에서 정치를 언급하는 건 금기에 가까웠다. 각자의 관심도나 지식의 정도와는 무관하게, 모두 필자와 같은 두려움을 지녔기 때문일 거다. 한데 올 초부터는 종종 정치 얘기를 화두로 삼곤 한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국가정보원의 여론 조작도 조금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덕에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에 판을 치는 괴기한 어휘나 조악한 합성 이미지, 원색적 비난과 조롱에 거부감을 느낀 우리 세대는 정치와 거리를 두려고만 했다. 허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난 덕에, 토론과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과정을 이제야 일상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됐다.

물론 좌빨, 수꼴 따위의 발원을 국가가 주도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심리학자에게까지 자문해가며 저질렀던 국가정보원의 추악한 행태가 폭력적이고 소모적인 인터넷 정치 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악행을 증명하는 문건들은 모두 특정 진영만을 겨냥한 것이었음에도 대응하는 용어가 탄생했고, 끔찍한 ‘정치용어’를 남발하며 반(反)지성주의적인 논쟁에 동참한 것은 결국 우리다. 서로를 적대시하며 대립각을 세운 게 대다수였고, 그저 모른다며 외면하고 묵인한 이도 다수다. 국가가 시작했을지언정 폭력성을 앞세우기만 했던 우리가 자처한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전임 정부의 부정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최근, 반갑게도 ‘팬텀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흔적 없이 소통하며 강력하게 목소리 내는 우리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다. ‘강남역 묻지 마 살인사건’, ‘스크린도어 수리 청년 사망 소식’에서의 포스트잇 붙이기 운동이나 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촛불집회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 모두 온라인상에서의 논의가 명확한 주체 없이 실제 활동으로 이어진 사례다. 그른 일에 분개해 올바른 행동에 나선 우리 세대가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팬텀세대의 주요한 특징으로 꼽히는 익명성을 방패삼아 각자의 조악 표출은 계속되고 있고, 비이성적인 논쟁 또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깐의 우쭐함에 취해 회귀한다면, 결국 팬텀세대는 그 말마따나 찰나의 환상이자 허상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팬텀세대’라는 말조차 우리 세대를 옭아매려는 악의는 아닐지 의심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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