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2016)

한 할아버지가 탑골공원에서 소영(윤여정 분)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봐요, 댁이 그 죽여주게 잘한다는…” 소영이 대답 없이 몇 걸음 걷더니 흘낏흘낏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로, 성매매하여 생계를 이어간다. 탑골공원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한 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후 ‘실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이러한 소영의 사연을 보여준다. 

소영은 오랜만에 만난 옛 단골 재우(전무송 분)로부터, 세비로송(박규채 분)이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병원에서 마주한 그의 모습은 소영의 기억과 달랐다. 신사차림은 온데 간데 없고, 병상에 누워 어느 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사는 게 창피해’서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소영은 손을 벌벌 떨며 그의 입속으로 농약을 들이붓는다.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이는 그 뿐만이 아니다. 노인 종수(조상건 분)는 남루한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재우도 아들의 죽음과 부인과의 사별로 인한 고독으로 괴로워한다. 소영은 이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노인들이 겪는 늙음에 대한 무기력함과 질병, 빈곤, 가족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 그러한 상태로 막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을 거쳐 생을 마감한 그들을 보며 소영은 멍한 듯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이후 소영은 살인죄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납골함 이름 위에 ‘무연고’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양옆엔 비슷한 나이대인 사람들 이름이 무연고라는 글자 아래 놓여있다. 

소영이 노인들을 죽여주는 여자가 된 기저에는 ‘노인 문제’가 있다. 사회는 늙음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 내지 경제 빈곤에 빠진 노인들에 관심 가지지 않는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한다. 이재용 감독은 이러한 노인 문제 원인을 소영을 내세워 말한다. 소영‘만’이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 그래서 죽여 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사회는 경험해보지 않은 ‘늙음’을 공감하지 못해,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한 것이다. 사회가 이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면, 영화 장면 속 노인처럼 비참한 상황에 내몰려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처럼 젊은 우리가 노인 문제를 겪지 않는 것이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듯이, 노인들도 과오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노인 문제로 파생되는 고통은 그들만의 것으로 두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소영이 더 이상 같은 처지의 노인들을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될 이유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