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영화를 단순명료한 세 가지의 질문으로 판가름하는 테스트가 있다.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가 그것이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더욱 복잡하고 모호한 예술인 영화를 단 세 개의 질문(그 질문이 무엇이든 간에)으로 평가한다니 그보다 멍청하고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그 테스트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를 전면화하고 그 문제를 수정해보려는 의지가 여기에 새겨져 있다. 간단히 말해 벡델 테스트는 영화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를 계량하기 위해 고안된 성평등 테스트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인물이 두 명 이상 나오는가? 둘째, 그 여성들이 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가? 셋째, 그들 대화에서 남성이 아닌 다른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질문이 신통찮다고? 물론 이 세 개의 질문 항이 영화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마법의 열쇠일 리 없다. 심지어 페미니즘 영화임을 인증하거나 훌륭한 영화를 판가름하는 공평무사한 잣대로도 쓰일 수 없을 것 같다. 이 질문 항에 따르면 여성 주인공의 1인극 스페이스 오페라인 <그래비티>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2차대전 중 대대적인 철수작전을 그린 전쟁영화의 걸작 <덩케르크>도 불합격이다. 그러니 마음 불편하게 하는 이런 테스트 따위 폐기해버리면 속 시원하련만 그럴 수는 없다. 이 단순한 질문에는 영화가 저질러왔던 심각한 젠더 편향을 겨냥한 예리한 칼날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의미다.

먼저,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는 영화에서 여성이 기능적이거나 보조적인 시각적 대상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희생자-시체 1, 거리에서 마주친 섹시한 여자 2 또는 남자 주인공의 엄마나 아내 말고, 여성을 남성인물처럼 자아 정체성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 다루고 있는가의 문제다. 두세 번째 항이 묻는 것도 결국 같은 것이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그의 누구’로만 규정되지 않는 여성 주체들이 만나서 ‘그’에 관한 얘기 말고 다른 주제로 대화한다는 것은, 스크린에서 여성을 물화된 익명의 유기체가 아닌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있는가를 묻는 셈이다.

스웨덴 영화계는 2012년부터 벡델 테스트를 도입하여 인증마크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드라마틱하다. 그때까지 스웨덴 영화에서 ‘말하는 여성’은 고작 30%였지만 벡델 테스트 도입 5년 만에 그 비율이 80%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이를테면 으레 남성들로 채운 회의 장면에 여성의 자리를 안배하는 식으로 스웨덴 영화는 점차 변화해갔다. 그래서 스웨덴 영화가 얼마나 훌륭해졌는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스웨덴 영화의 젠더 감수성만큼은 한두 뼘쯤 높아졌을 거라는 사실이다. 벡델 테스트가 지닌 한계와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 영향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여성의 존재를 가늠해보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벡델 텍스트를 지금 여기의 한국영화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검사외전>, <더 킹>, <공조>, <아수라>, <동주>, <택시운전사>, <브이아이피>, <청년경찰>… 결과는 뻔하다. 나는 지금 한국영화계에 벡델 테스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벡델 테스트를 꺼내든 이유는 젠더 감수성이 유독 떨어지는 지금 한국영화의 문제를 태양 아래 가시화하려는 의도에서이다. 물론 지금 한국영화의 ‘젠더 감수성’ 이슈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전 세계 영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말은 영화가 인류의 절반을 잘못 표현해왔다는 뜻이다. 그건 인류의 나머지 절반에게도 결코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다. 젠더 간 대립과 차별, 편견,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데에는 영화의 책임이 적지 않다. 현실의 우리처럼, 스크린의 여성들도 이름과 목소리가 필요하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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