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이없는 사건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204번 버스 사건’. 버스 운전사가 승객을 자칫 이산가족으로 만들 뻔한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고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해당 운전사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는데, 알고 보니 문제는 승객에게 있었고 버스 기사는 공연히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SNS를 비롯한 사이버공간에서 무턱대고 생사람을 잡기가 얼마나 쉽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내 준 사건이라고 말이 많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흑백논리’와 ‘도덕주의’가 이런 사건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보스기사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알려졌을 때, ‘과연 그것이 진상의 전부일까? 버스기사 쪽의 말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신중함, ‘그게 사실이라 해도, 오죽 버스 기사의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랬을까? 버스 기사의 업무 강도에 대한 검토와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접근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과연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한가?’라는 흑백논리, 그리고 ‘기사가 나쁘다’라는 섣부른 판단 뒤의 가혹한 비난과 혐오가 사이버공간의 특성을 활용해 있는 대로 몰아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흑백논리와 도덕주의적 접근은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6세기 말, 홍의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곽재우는 의병장으로 큰 활약을 했다. 그러나 그는 강직한 한편 괄괄하고 급한 성격이기도 했는데, 김수라고 하는 관찰사가 왜병과 싸우다 패퇴하자 ‘김수 이놈은 장수로서 죽기까지 싸우지 못하고 달아났으니, 역적과 같다. 누구든 조정의 명을 기다릴 것 없이 김수의 목을 베어야 한다! 만약 그 일을 말리는 사또가 있다면 또한 역적이니, 함께 목을 베어버려라!’라고 사방팔방에 격문을 돌렸다. 

장수가 패배해 달아나는 일이 결코 당당한 일은 못된다. 하지만 매번 이길 수는 없는 일이고, 패배할 때마다 목숨을 버린다면 장수가 바닥날 지경이 되지 않을까? 김수는 자신을 ‘왜적 괴수인 수길보다 더 악독한 자이니 왜병과 싸우기에 앞서 김수부터 처단해야 한다’는 곽재우에게 분격했으며, 거꾸로 곽재우가 민중을 선동하고 국법을 무시한다고 조정에 고하여 곽재우에게 징계가 내려지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비겁한 소인배가 영웅을 참소한 이야기’로 전해졌지만, 곽재우가 조금만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만 나누려 하고, ‘악’에 대해 지나치게 비타협적으로 대함으로써 비극을 낳았던 예는 이보다 앞서 조광조와 남곤의 이야기에서도 엿보인다. 남곤은 오늘날 조광조를 모함해 죽인 훈구파의 대표로 알려졌지만, 사실 훈구파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개혁적 사대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옳다 여기는 일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조광조에게 보다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는데, 조광조로부터 냉소와 경멸만을 들었다. ‘적폐를 옹호하는 당신도 적폐’라는 평가와 함께! 남곤은 그런 모욕을 견딜 수가 없었고, 끝내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음모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조선왕조 내내 흑백논리와 도덕주의는 ‘춘추대의’라는 이름으로 존중받았다. 심지어 ‘잘잘못을 가릴 때는 사실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보기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국가기관이 취하기도 했다. 숙종 때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가 있는 사람이 풀려나자 습격해서 죽인 여성이 있었는데, 왕은 그녀를 살인죄로 처벌하기는커녕 ‘그 정절이 실로 가상하다’며 상을 내리고 열녀문까지 세워주었다. 나중에 다산 정약용은 <흠흠신서>에서 이 일을 개탄하며, ‘그는 혐의를 받았을 뿐, 실제 범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풀려난 것인데 그녀가 오해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의 조정은 본보기를 보인다는 명목으로 범죄자를 포상했으니, 법의 왜곡이 심하다!’라고 했다.

도덕적으로 선명한 판단을 하는 일은 중요하다. 죄와 벌에 대해 확고부동한 태도를 가질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부작용으로 더 큰 악을 낳을 수도 있다. 또한 ‘악’을 비난하는 행동이 과연 정의의 실현을 바라기 때문일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버리기 위함인지 불분명할 수도 있다. ‘한국에는 건전한 토론 문화가 없다. 한 사람이 떠들고 상대방은 침묵하거나, 서로 자신의 입장만 외쳐댈 뿐이다’라는 지적을 귀담아들을 까닭이다.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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