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단편소설 <봄밤>은 12년 전 마흔셋 봄에 처음 만난, 지금은 쉰다섯이 된 수환과 영경의 이야기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신랑, 신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셨다. 수환은 술이 취한 영경을 업어서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그들은 다음 날부터 매일 만나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영경을 만나기 전, 수환은 자기회사를 경영하다 부도가 났다. 위장이혼을 한 아내는 남은 재산을 처분해서 도망쳤고, 수환은 신용불량자가 된다. 그 이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언제든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영경은 중등교사로 일하다가 서른둘에 결혼을 하고 1년 반 만에 이혼을 했다. 남편은 이혼하자마자 재혼을 했다. 백일 된 아기는 영경이 키웠는데, 전(前) 시부모가 한 달에 한 번 아기를 데려가 아빠와 만나게 했다. 그러다가 영경 몰래 아기를 데리고 이민을 떠났고, 그 이후 영경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각자의 친구들이 새 출발을 하는 결혼식장에서 만났지만, 서로의 인생은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태였다. 빈손과 공허한 마음, 텅 빈 눈을 지닌 이들이 서로를 마주했을 때, 수환과 영경의 앞날도 신랑, 신부가 걸어갔던 꽃길처럼 환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게 된다. 어쩜 두 사람 역시, 서로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독자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면서 두 사람을 더 극한의 상황으로 내몬다.

현재 수환과 영경은 노인과 중증환자들을 전문으로 돌봐주는 지방요양원에 거주 중이다. 수환은 류머티즘 관절염과 합병증으로, 영경은 중증 알코올중독과 간경화, 심각한 영양실조로 입원하게 됐다. 영경은 요양원에서 몰래 술을 마시다가 적발되었고, 한 번만 더 걸리면 퇴원 조치를 하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영경이 푹 파인 볼을 내밀었다. 수환은 숨을 멈추고 가만히 영경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다녀올게. 그래 잘 다녀와.”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영경은 구토와 불면, 경련과 섬망 증상에 시달리다가 외출증을 끊어 요양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며칠 동안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환자이면서 보호자이기도 한 수환은 이런 영경을 제지하기는커녕, 외출을 허락한다. 

권여선의 소설이 빛을 발휘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장면에서다. 수환이 영경의 건강과 미래를 생각한다면,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의 외출을 막아야 한다. 술을 끊고 재활치료를 하며,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독한 주사까지 맞고 멀쩡한 척”하면서까지 영경을 배웅한다. 제가 아프지 않아야 영경이 외출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수환에게 사랑은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것,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 보다 상대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가진 것 없는 두 사람이 만나서, 더 가진 것 없는 악화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그리하여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쓰디쓴 입맞춤뿐이지만. 두 사람은 ‘없음의 사랑’을 행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서 악착같이 생을 버텨낼 수 있었다.

흔히들 사랑하면 낭만적이고 아름다우며 달콤한 장면을 떠올린다. 혹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청춘남녀의 열정적인 사랑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랑과 비교했을 때 수환과 영경의 사랑은 초라하고 남루해 보인다. 하지만 사랑의 방식과 유형이 모두 똑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꿈꿔나간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다 읽고 제목을 다시 보게 된다. 쌀쌀해지는 가을 날씨와 다르게 소설의 제목은 <봄밤>이었다. 

오선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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