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1921년 9월 26일, 부산 부두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쳤다. 탄압을 더 감내하기 어려웠던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일본 자본가를 향해 저항했다. 이를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이라 한다.

  농민은 개항 후 일제의 조선 경제 식민화 과정에서 몰락했다. 이후 그들은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모여 임금노동자가 됐다. 당시에는 공업이 발달하지 않아 대부분 운수산업에 종사했다. 부두 노동자들은 타 업종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다. 하지만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불황일 때는 한 달에 열흘 이상 쉬어야 했기에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져 갔다. 뿐만 아니라 중간 관리인 ‘십장’은 노동자의 몫을 갈취하면서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1921년 일본 자본가들은 공황의 여파로 노동자 임금의 50%를 삭감했다. 이는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우선 석탄 운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뒤이어 부두 하역 노동자 2천여 명이 임금 인상 요구 파업에 뒤따랐다. 하지만 하역 업체는 이를 묵살했다. 그러다 9월 26일, 부산 전역 운수 노동자 5천 여 명이 파업에 들어섰다. 선박 하역, 철도 운반 등 여러 노동자들이 단결한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움직임은 일본 자본가를 당황케 했고 그들의 내부 분열을 촉발했다. 노동 운동은 부산 지역뿐 아니라 모든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확대됐다. 이에 일본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비가입자를 모집하는 등 방해공작을 펼쳤다. 하지만 이미 강고해진 노동자들의 단결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업체와 교섭을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 목표했던 임금까지 인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보다 1~1.5할 정도 임금을 인상하는 데 성공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이 공고하지 않았던 당시에 성공 요인은 노동자들의 단결이었다. 그 외에 많은 조선인 사회의 지원도 승리 요건으로 작용했다. 비교적 학력이 낮았던 청·장년 노동자들을 교육한 야학교사들, 그리고 파업 선전문을 인쇄한 경남인쇄주식회사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오미일 교수는 “노동운동이 성숙하지 못했던 때 단결의 중요성을 깨닫고 조직적인 행위를 보여준 사건”이라며 “노동자들의 최초 대규모 움직임으로서 노동운동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라고 전했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