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을 생각하면 분명 이맘때쯤 여전히 매미가 기승을 부리고 더위에 허덕였던 것 같은데 올해는 맹렬했던 더위가 강하게 온 만큼 짧게 지나가는 듯하다. 성큼 다가온 가을이 어느덧 높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불러오고 사람들의 옷차림새에서도 가을 냄새가 물씬 난다. 가을하면 멋쟁이의 계절이라 하더니 일찍 다가온 가을 날씨에 8월 말 패션 매출이 이례적으로 높은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그중 트렌치코트는 70%, 가벼운 니트와 카디건은 무려 260%의 증가율을 보인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트렌치코트와 카디건은 놀랍게도 모두 전쟁터에서 만들어졌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트렌치코트는 참호에서 입는 옷이라는 이름 그대로 참호를 비롯한 전쟁터에서 맞는 가을·겨울의 차디찬 바람과 얼굴을 때리는 시린 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1914년부터 벌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이 체온을 보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트렌치코트는 일상으로 복귀한 군인들이 계속해서 애용하면서 유행이 됐다가 현재는 전 세계의 많은 멋쟁이가 즐겨 입는 클래식한 옷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트렌치코트 하면 브랜드 버버리가 유명한데, 실제로 이 브랜드의 창시자이자 흰 수염의 멋있는 신사인 토머스 버버리가 1901년에 영국의 군인들을 위해 고안해 낸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감자탕이나 갈빗집의 원조를 따지는 수많은 가게가 있는 것처럼 트렌치코트도 마찬가지라 방수복을 전문으로 만드는 브랜드, 아쿠아스큐텀에서는 자신들이 크림 전쟁에서 이미 이러한 방수 코트를 제안했다며 원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봄, 가을의 쌀쌀한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햇볕의 따가움을 막아주며 겨울에는 한 겹이라도 더 입어 체온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카디건은 (그 자체로도 너무 익숙한 옷이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흔치 않겠으나) 스웨터의 앞면을 자르고 단추를 단 형태의 옷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뜨개질이 등장한 이후 거의 곧바로 생겨난 것으로 추측되는 스웨터는 그 유래를 알기 어렵지만, 카디건은 역사가 나름 잘 기록되어있다.

17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부 지역, 춥고 습하며 변덕스러운 바다에서 일해야 했던 어부들은 추운 날씨에 견디기 위해 스웨터를 입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덥고 땀이 나 스웨터를 벗고는 했는데, 그럼 또다시 물에 젖어 으스스한 기분에 덜덜 떨다 보니 체온을 쉽게 조절하기 위해 스웨터를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고 그것이 카디건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 이런 형태의 옷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0년 후 이 옷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한 제임스 브루드넬, 제7대 카디건 백작에게서 카디건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크림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제임스 브루드넬 백작은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경갑 기병 부대를 이끌었다. 비록 전장에서의 성과는 그리 좋지 못했고 백작이 적을 앞에 두고 부대를 버려둔 채 몰래 도망을 쳤다는 소문까지 났지만, 그는 추운 날씨에 떨고 있는 부대원들에게 옷을 나누어주는 인정을 베풀기도 했던 모양이다. 백작이 나누어준 옷은 위에 걸쳐 입을 수 있도록 앞에 단추가 달린 스웨터였고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주 입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환절기에 부는 차가운 바람을 막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던 이 옷은 카디건이라고 불리며 현대에 와서는 날씨가 쌀쌀해지면 바로 떠오르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로 완전히 자리매김하였다.

역사를 어렵고도 먼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에도 패션 업계가 주목하는 매출의 상승을 이루어내는 가을 아이템들이자 가을바람이 불면 입을 생각에 설레는 옷들이 사실 17세기부터 시작된 패션임을 생각하면 역사라는 것은 매일 한 겹씩 층을 쌓아가며 우리의 일상과 가깝게 지속하고 있다. 그러니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카디건을 걸칠 때면, 오래전 바다와 싸우고 전쟁을 치르며 카디건을 입었던 옛사람들의 삶도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이주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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