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앞에 무너진 성주의 평화

“지금 사드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경찰들이 마을 회관을 둘러싸고 있어요 다들 회관으로 모이십시오”.

며칠 전부터 사드가 배치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지킴이들에게 마을회관을 맡기고, 잠시 눈을 붙이러 각자 집으로 잠시 흩어지던 참이었다. “우리 빨리 뛰어나와야 하니까 옷 벗지 말고 잡시다”, “비상벨만 울려주소 바로 달려 나올 테니까”.

주민들끼리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간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을회관에서 비상벨과 소성리 부녀회장 임순분(64) 씨의 안내 방송이 울렸다. 밤 12시에 정부가 기습적으로 사드를 배치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새벽 두 시쯤 마을회관 앞에는 주민 80여 명이 겨우 모였다. 이미 마을은 경찰차로 가득 찼고 주민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가용 10대로 마을회관 앞 도로를 막고, 원불교 교무와 천주교 신부가 도로 위에서 종교행사를 열었다. 한쪽에서는 사드가 배치되면 바로 달려 와주기로 한 모든 외부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는 소성리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경찰이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아무리 기다려도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날 소성리에는 마을에 상주하던 시민단체 회원들을 포함해 100여 명뿐이었다. 이들이 경찰 8,000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사드 발사대를 실은 군용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주민들은 도로에 드러누웠지만 경찰은 무자비하게 끌어내 마을회관 앞에 내팽개쳤다. 다 여섯 겹의 경찰 방패 너머로 유유히 지나가는 군용차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방패 밑으로 기어도 가보고 경찰에게 비키라고 소리도 쳐보고 몸싸움도 해봤지만 곧바로 방패에 밀려 나뒹굴 뿐이었다. 주민들은 무력에 가로막혀 마을이 사드 기지가 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딱 뭐가 떠올랐냐면 5·18 광주 항쟁. 광주는 청년이 앞장섰지만 여긴 60대가 제일 젊고 100 대 8,000 이었으니 광주보다 더한 상황이었던거지”.

첫 번째 사드 발사대가 들어간 뒤 마을에는 절규와 통곡 소리만 들려왔다. 일 년 동안 싸운 게 너무 억울해 대성통곡하는 주민도 있었다. 아직 두 번째 사드 발사대가 남은 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경찰들이 철수 안 하고 계속 주민들 막고 있었어. 나머지 사드 하나가 길 못 찾고 헤매다가 5시 돼서야 들어 온 거야 그러다”. 동틀 무렵, 두 번째 사드 발사대가 소성리에 들어왔다. 첫 사드는 밤이 어두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사드가 눈에 확연했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미군 병사가 씩 웃으며 주민들이 절규하는 모습을 폰으로 찍는 모습을. 그 모습에 화가 난 임순분 씨는 군용차를 저지하려 달려들다 기절하고 말았다. 경찰의 팔꿈치에 인중을 맞은 거다. 주민들은 쓰러진 그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경찰들을 향해 살려내라며 울부짖었다. 경찰은 들은 채도 안 했다. 부상자들을 실어가기 위한 구급차는 방패에 가로막혔고, 저지선 앞에서 경찰과 주민의 실랑이 끝에 30여 분 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날 임순분 씨 외에도 13명의 시민이 갈비뼈에 금이 가고 팔뼈가 부러지는 등 부상당했다. 그렇게 전 국민이 잠든 사이 소성리 마을 주민들은 공권력에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소성리는 주민들이 농사짓고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70가구에 150여 명밖에 안 되는 인구, 그마저도 7~80대 노인이 주로 살던 고령화 마을. 60대가 막내라고 불릴 정도였다. 밤에는 산짐승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하던 이 작은 마을이 이제는 전쟁터가 돼버렸다. 농민가 노래도 잘 몰랐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사드 배치가 아니었으면 평생 들어볼 일이 없었다. 그런 소성리 주민들이 지금 이렇게 사드 배치를 반대하게 된 이유는 하나다. “이 땅에 손주들이 할머니도 찾으러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손주들이 마을에 오게 하려면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그렇게 그들은 낫과 호미 대신 사드 반대 피켓을 들었다.

“이런 곳에서 야당 후보 찍는 건 진짜 큰 결단이거든”.

19대 대선을 2주 앞둔 시점에 마을로 쳐들어온 사드는 그들을 분노하게 하기 충분했다. 보수 정당만 고집해오던 소성리 주민들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때마침 사드 배치 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소성리를 찾았다. 찾아와서 ‘문재인 후보가 함께하겠다’, ‘그가 대통령 되면 달라질 거다’ 등의 말을 늘어놨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혹시 5월 9일 전에 나머지 사드가 배치될까 싶어 주민들이 함께 사전투표도 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주민들은 거리에 나와 환호하며 케이크를 잘랐다. 실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마을에 있던 경찰의 대응도 달라졌다. 1개 중대만 두고 나머지는 철수했고, 그나마 남은 중대도 주민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의 절차 문제를 지적했을 때는 박힌 사드를 빼내 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딱 그때까지였다.

그러나 지난 7월 29일 문재인 대통령은 그 전날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사드 4기를 조속히 임시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드나들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당선 후 단 한 번도 안 찾아왔지만 그래도 믿고 있었다. 그의 결정에 주민들의 배신감은 컸다. “내가 그동안 1번만 찍어서 고통받았는데, 이번에는 정권 바꾸면 달라질 거라고 1번 찍었는데… 이제는 이놈의 손가락을 자르든 해야지 내가 이렇게 찍어서 낭패만 보고 있어”.

“그래도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자. 결사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임시배치 발언 이후 한 달이 지났다. 환경영향평가가 끝나가면서 사드 발사대 추가배치 시기가 임박했다는 소식 때문에 하루하루 안심할 수 없다. 그러나 주민들은 4월 26일에 겪었던 일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에 피가 마른다. 사드가 추가배치 된다고 했다가 무산된 지난달 29일만 해도 그렇다. 마을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한 주민이 돌연 도로 위에서 목 놓아 울어버렸다. “울지 말고 가서 밥이나 먹어” 하며 핀잔을 주던 다른 주민들도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소성리 주민들이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 트라우마 등의 단상이었다.

그럼에도 소성리 주민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나머지 사드마저 마을에 들어오는 꼴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 같은 늙은이는 사드 들어오면 막으러 나오는데 집에서 시간이 한참 걸려. 그러니까 전날 발표 나면 말해줘 마을회관에서 자게”. 허리가 다 굽어 보행보조기를 끌고 다니는 80대 노인도 결의에 찬 상태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뭘까. 소성리 마을 주민들이 내건 슬로건은 ‘평화’였다. “더는 마을 어르신들 마음에 상처 주지 말고. 그리고 저 지킴이들도 자기 일상생활로 돌아가게끔 하고 싶어. 다들 마음 편히 살 수 있기만 바라 그냥…”. 당연히 ‘평화’로웠던 일상이 이제는 꿈이 돼버린 소성리 마을. 아직 그 꿈이 이뤄지기까지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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