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군함도>가 올해 여름 시장에서 침몰했다. 아마도 2017년 한국영화계에서 벌어진 가장 큰 이변 중 하나일 것이다. 예고편이 공개될 즈음만 해도 천만 관객을 예약해 놓은 영화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라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한 지금의 결과는 아무래도 충격적이다. 그렇게 사라진 <군함도>는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거리를 남겼다. 영화 안팎에서 퍼져나간, ‘유감’이라 말할 만한 그 세 가지 지점을 다시 생각한다. 

첫 번째 유감. <군함도>는 스크린 독과점 논쟁을 불러온 다음, 모두의 욕을 먹으며 침몰했다. 2천 개가 넘는 스크린을 장악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 <군함도>는 ‘울트라 와이드릴리스’하고도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최초의 영화로도 기록될 전망이다. 그 과정에서 이 배급의 규모에 아무런 권한이나 책임이 없는 류승완은 이러저러한 매체에 불려 다니며 ‘송구하다, 민망하다’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관객들의 마음속에 <군함도>는 어느새 한국영화의 배급생태계를 망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스크린 독과점이 사회적인 논제로 떠오른 것은 긍정적이나 그 십자가를 감독에게 지운 것은 유감이다. 타겟은 CJ, 롯데 등의 대기업 배급사여야 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나쁜’ 시스템 대신 한 편의 영화나 한 명의 감독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비겁하고 부당한 일이다. 무엇보다 최악은 <군함도>가 망하는 것을 보고 독과점 논의를 끝내는 짓이겠다.

두 번째 유감은 ‘국뽕’과 ‘식민사관’으로 양분된 극단적인 관객 반응에 있다. 관객 반응이라고는 했으나 실제로 영화를 본 이들의 견해인지는 불확실하다. 영화를 봤다면 어느 쪽으로도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국뽕이라는 신조어가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우파 프로파간다 영화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이라면, 한국영화에 국뽕의 전통이라는 것이 있고 명확히 거기에 호소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된 우파영화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겠다. 또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과연 어떤 감독이 온전한 정신으로 식민사관 영화를 만들까 싶지만, 여기서 그 흔적을 지적하는 이들은 단순히 영화 속 친일파의 존재를 문제 삼은 것 같다. 그렇다면 <암살>은 어떻게 국뽕 영화라는 경멸을 면하고, <밀정>은 어떻게 식민사관영화라는 오해를 피할 수 있었던가. 국뽕과 친일이라는 표면적으로 상반된 이 두 견해는 이 영화에 대한 실제 반응이라기보다 영화 바깥에서 밀고 들어온 이념적 대립의 단세포적인 표출처럼 보인다. 내게 이 논쟁은, 수상하고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그러나 그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대리 전장이었던 <군함도>로서는 지극히 유감스러운, 이 여름의 헛소동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 유감이 영화 바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세 번째 유감에 와서야 비로소 영화 얘기가 된다. 나는 류승완의 오랜 팬이며, <베테랑> 이전 그의 저예산 상업영화들이 과소평가되었다고 믿는 편이다. 그의 혈관에는 B급 장르영화의 쾌감이 흐르고 있다. ‘액션 키드’로 불렸던 류승완은 하시마섬을 무대로 삼은 역사 영화를 구상하면서도 자신의 영화적 DNA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현대사의 비극, 거대예산의 블록버스터, 그리고 액션. 어쩌면 류승완은 이 세 조합(이 품은 근본적 모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어야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비극을 세상에 알리면서 동시에 대탈출극의 스펙터클로 시각적 쾌락을 재현하겠다는 그 야심 찬 연출의 분열상에 관해. 

문제는 대탈출극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 있지 않다. 이는 역사 왜곡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상상력의 영역이다. 여하간 역사에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상상력이 영화 초중반의 비극적 실재를 영화 후반 대규모 스펙터클을 동원한 쾌감의 판타지로 대체한 점이 문제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함도>는 류승완의 영화로도 아쉽고, 역사영화로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토록 냉랭한 반응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텍스트 밖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작 이 영화에 대해 별로 말한 적이 없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