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일이 있다.

같은 옷을 입은 수백의 빡빡머리가 군집한 자리였다. 오열에 따라 번호가 매겨졌고, 필자는 118번을 배정받았다. 그렇게 매겨진 번호는 무려 5주 동안이나 이름을 대신했다. 그게 뭔 대수냐 싶을 거다. 헌데 이름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이 생각보다 컸다. ‘118번 훈련병’을 부르던 조교들 앞에서, 자존감은 물론 수십 년의 정체성마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필자는 그들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고압적인 자세 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 무섭던 조교들이 이름 한 번 불러주면 친근감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와중에도 이름을 불러주던 동기들 덕에 5주를 버텨냈고, 비로소 고유한 ‘나’를 되찾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내 이름이 아니었다. 십 수년째 살던 집 주소가 순식간에 이름을 잃게 된 일이었는데, 바로 2014년부터 전면 시행한 도로명 주소 제도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주소가 하나 늘어나더니, 그게 어느새 본래의 것을 대체하고 있었다. 사는 곳은 그대로인데 이름만 쏙 바뀌어버린 것이다. 단지 그 뿐이었지만 마치 내 역사를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미동 사람들’이 ‘부천로 사람들’로 퇴색하듯, ‘남산동 사람’의 정체성과 기억은 깡그리 실종돼버렸다.

최근에는 도서관 명칭이 변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1도서관이 중앙도서관으로, 제2도서관이 새벽벌도서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교내 건물의 명칭이 바뀌는 일은 워낙 잦고, 도서관 역시 수차례 이름을 바꿔왔기에 그러려니 했다. 또 다른 두 건물도 함께 변경된다기에 더욱 그랬다. 단지 학교 졸업생으로서 향수나 추억 정도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기능’ 운운하는 변경 사유를 듣다보니, 이번에는 상실감을 넘어 씁쓸함까지 느껴졌다. 

‘118번 훈련병’이나 ‘부천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자체로는 주목받지 못하고, 그저 ‘효율적 관리’에만 끌려 다니는 꼴이 말이다. 사실 필자는 제1도서관을 ‘연구도서관’, 제2도서관을 ‘중앙도서관’이라 불렀는데, 이를 떠올리니 더욱 씁쓸해졌다. 각 건물이 신축될 당시부터 불렸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딱히 고유한 것으로 불러야한다 신경 쓰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이들이 거쳐 가며 쌓아왔던 것들이 대물림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신입생은 편리하게 이용할 것”이라는 취재원의 말에선, 정체성이나 역사는 커녕 이를 쌓아올린 어느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것들이 이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김춘수의 시처럼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꽃이 된 이들의 존재가치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각자의 이름 위에는 나름의 정체성과 역사가 쌓일 수 있었다. 그 자체를 부정한다면,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고유한 존재에 대한 존중은 이름부터일 텐데, 이를 쉬이보는 세상은 꽤나 삭막할 테다. ‘나’는 없고 ‘118번 훈련병’만 있었던 그 훈련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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