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잘못한 게 없는 데요’. 영화 <한공주>에서 공주(천우희 분)가 끝내 뱉어낸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이후 공주의 행동은 이상했다. 갑자기 짐을 싸고 선생님을 따라 어디론가 떠난다. 왜 떠나는 걸까? 잘못한 것이 없다면 오히려 당당하지 않은가. 계속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을 하는데, 왜 도망가야만 했을까?

공주는 과거 성폭행을 당했다. 무려 43명으로부터. 여느 때처럼 자기 집에서 단짝 화옥(김소연 분), 화옥의 남자친구 동윤(김최용준 분)과 함께 밤을 보내려고 했으나 그 날은 다른 불청객도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동윤의 친구들은 동윤을 협박하고 공주와 화옥을 강간하기 시작했다. 방 안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 스테이플러 소리, 남자들의 목소리는 공주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울려 퍼지는 공주의 울음소리는 그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성폭행을 당한 후였다. 공주의 둘도 없는 단짝 화옥이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임신한 상태였다. 공주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화옥이 환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러한 죄책감에다가 가해자 부모들의 합의 요구 재촉은 공주를 더 압박했다. 계속해서 학교를 찾아온 가해자 부모들로 인해 공주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멀리 도망갔음에도 공주의 기억 속에는 선명했다. 선풍기 소리, 스테이플러 소리 그리고 남자들의 목소리. 그 당시의 흔적들만 들어도 공주는 괴로워했다.

그러한 트라우마를 무릅쓰고, 가혹한 현실에 맞서 살아가기 위해 공주는 노력한다. 수영을 배우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도 공주는 자조적인 입장이다. 새로 사귄 친구 은희(정인선 분)에게 “(노래는) 힘이 되는데, 현실에 나타나지 않아”라고 말한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은 이뤄질 수 없었단 걸 이미 알고 있던 것일까. 새로운 학교에도 가해자 부모들이 찾아온다. 지옥 같았던 일상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 밀려 끝내 공주는 물에 몸을 던지기로 한다. 결국 현실에 순응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는 공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단지 물속에서 헤엄치는 공주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한공주>는 ‘밀양 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현실은 오히려 영화보다 더 잔인했다. 실제로 경찰은 ‘네가 밀양 물을 다 흐려놓았다’라고 폭언했고, 아버지란 자는 5,000만 원으로 합의 봐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가해자들은 모두 전과 기록이 남지 않은 채 풀려났으며 현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가해자 부모의 난동으로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더 고통 받아야 했고 더욱 숨어 들어가야 했다. 영화는 공주를 통해 이런 사회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영화속 공주는 단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시 피해자가 되어야만 했다. 영화는 그녀의 소소한 바람이 이뤄질수가 없는 현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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