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부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토벽동인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우리 지역의 향토성을 그린 ‘토벽동인’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부대신문>이 전시장을 찾아가 그들이 그린 부산의 모습을 만나보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당시, 피란수도 부산으로 전국의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다양한 예술인들로 부산 미술계가 채워질 때, 부산의 정체성을 꾸밈없이 보여주기 위해 부산・경남권 작가들이 모여 ‘토벽동인’을 결성했다. 배진영(경성대 사학) 초빙교수는 “중앙 화단의 화가에 대한 마이너리티로 토벽동인이라는 집단이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당시 토벽동인은 창립선언문에서 ‘새로운 예술이란 것이 천박한 유행성을 띄운 것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닐 진데 그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인식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고 그들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토벽동인은 부산 지역의 소재로 형상 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이들의 그림은 물질감 있는 붓 터치가 돋보이며, 인체를 그리는 색깔이 대부분 황토색으로 향토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옥영식 미술평론가는 “토벽동인은 그들의 이름처럼 흙벽과 같은 삶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며 “땀 냄새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감각과 정서를 추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토벽동인은 동시대 같은 장소에서 활동했던 ‘신사실파’와 자주 비교된다. 미술 성향에서부터 둘은 차이를 보인다. 신사실파가 추상화를 주로 그렸다면 토벽동인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에 배진영 초빙교수는 “이름이 알려진 중앙 화가는 추상화로 사람들의 해석을 이끌 수 있다”며 “지역 작가들은 이를 실현하기 어려워 한눈에 판단이 가능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전했다. 이 두 집단이 미술의 성향으로 비교하기 어렵다는 시선도 존재했다. 부산시립미술관 양은진 학예사는 “시대와 공간을 같이 했을 뿐 그림의 성향으로 비교될 수 없는 집단”이라며 “신사실파는 미술의 경향에 따라 묶여있다면 토벽동인은 부산 예술인의 정체성으로 뭉친 집단”이라고 전했다.

작품 전시 장소가 다르기도 했다. 토벽동인은 르넷쌍스・휘가로 다방에서 작품을 전시한 반면, 신사실파는 주로 국립박물관 임시사무소나 백화점 등에서 전시회를 진행했다. 이는 신사실파가 당시 선호되던 추상미술을 추구했고, 예술권의 기득권을 잡았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 그래서 규모가 크거나 시설이 갖춰진 장소에서 전시를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박도 있었다. 부산 화가들의 다방전시가 프랑스의 살롱문화와 결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부산시립미술관 류민주 기록연구사는 “광복동 일대는 예술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층의 집결지였다”며 “광복동 일대 곳곳의 다방에서 이루어졌던 전시 문화는 고급문화로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토벽동인은 부산 미술 최초의 자각적인 집단으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예술 기득권 층이 아니더라고 예술의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부산의 젊은 예술가들의 부산다운 예술 활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그들이 부산의 소재를 그리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소재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술의식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진영 초빙교수는 “토벽은 지역 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소재로 그 당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을 그렸다” 며 “애정을 가지고 부산을 그리는 향토적 리얼리즘”이라고 전했다.

 

지난 1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토벽동인전’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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