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되겠지’. 학창시절부터 늘 해오던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 ‘모든 일을 대충 한다는 뜻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쓰는 이 말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만큼 어떻게든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작년 9월 <부대신문>에 입사했다. 입사 지원서에 작성한 지원동기로는 고등학교 때 꿈이 기자였기에 한 번쯤은 기자가 되고픈 마음이 있어서였다. 물론 사실이지만, ‘나는 어떻게든 잘할 거야’라는 확신을 스스로 시험하고픈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부수습기자가 된 후, 그런 생각을 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후회하기도 했다. 매주 신문을 발행할 때마다 걸려왔던 취재원의 컴플레인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취재원의 말을 그대로도 전달하지 못했던 내 실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 부끄럽고 어딘가 숨고 싶었다. 그 순간부터 스스로 되뇌던 ‘어떻게든 되겠지’가 ‘이 정도면 됐지’라는 의미로 변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차피 매번 좋은 기사를 쓰지 못할 텐데’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졌던 것이다. 주어진 일에 항상 자신 있어 하던 나는 점점 나약해졌다. 한동안 이 모습이 지속하면서 기자 생활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자괴감에 빠졌던 것이다.

가끔 컴퓨터 속에 저장된 파일을 열어보곤 한다. 낙수를 앞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수습기자 당시 썼던 취재 계획서와 취재 대본 파일들을 발견했다. 어떻게든 실수하지 않으려 했다. 대본에 적힌 말을 하나하나 신경 쓴 티도 났다. 단신조차도 취재 계획서를 작성하면서 꼼꼼하게 확인했었다. 내가 그동안 그려왔던, 영락없는 기자의 모습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당시의 파일을 보며 과거 내 본연의 모습과 마주하게 됐다. 이는 정기자를 앞둔 상황에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좋은 기사를 쓰지 못할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이전처럼 ‘일단은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도전하자고. 오히려 그것이 심적으로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자주 썼던 이유는 하기도 전에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자는 의미였다는 걸. 그때 새삼 다시 느꼈다.

지난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앞으로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보다 ‘어떻게든 한다’라는 말로 바꾸기로 다짐했다. 그동안의 ‘되겠지’라는 말이 지닌 추측성이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다시 ‘이 정도면 됐지’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어서였다. ‘되겠지’를 ‘한다’라는 말로 바꿔야 내 의지를 다시 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낙수를 쓰고 난 후에도 내 능력이 눈에 띌 정도로 향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지녔던 마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앞으로의 내 모습에 의의를 두고 싶다. 낙수의 마지막 문장을 적으며, 앞으로의 나에게 다시금 ‘나는 어떻게든 한다’라는 확신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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