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던 김수영의 글귀가 무려 반세기 전의 것임에도 회자되는 건, 우리 역시 그런 어제를 보낸 탓이다. 미세먼지에 둘러싸여 앞을 가늠하기 힘든 반년이었다. 많은 이들이 아파했고 많은 곳들이 황폐해졌음에도, 우리는 거리에 나서 시야를 밝혔다. 그렇게 오늘을 맞았다. 다만 끝난 것은 아니다. 농단의 주역들은 아직 처벌받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은 이들도 숨죽이고 있다. 태세를 전환한 이들은 참으로 재빨라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그 덕에 결별이 멀었음을 실감한다. 그네들의 사진만을 ‘밑씻개’ 삼기에는 닦아야 할 오물이 너무나도 많기에,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냐고.

추한 민낯을 드러낸 데가 워낙 많았지만, 언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기레기’라는 말이 이토록 쉬이 쓰인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이라며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캐낼 때부터 인권 유린이었다. 합집합을 이뤘던 일부 종합지만의 얘기가 아니다. 공영방송은 권력의 앞잡이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고, 탄생부터가 유착이었던 종편은 보도나 논평보다 소문이나 악담 따위를 앞세웠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수일동안의 행태는 그 자체가 참사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를 위한 선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어느 치의 편에 붙어야할지 눈치 보기 바빴다. 교묘한 말장난으로 ‘사실’과 ‘진실’을 넘나들었고, 농지거리를 덧붙이며 ‘가짜뉴스’에 부채질하기도 했다. 그동안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고, 권위나 명예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언론의 영향력을 몸소 실감했다. 썩어빠진 실체를 확인한 것도 그 덕이다. ‘태블릿 PC 보도’를 시발점으로 사태의 전말이 드러났고, 우리는 이에 격분해 진실을 요구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여론에 떠밀린 다른 언론들은 그제야 제 기능을 수행했다. 쉬쉬하던 국회는 하야와 탄핵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요지부동하던 이는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의 파급력이다. 때문에 어제와의 결별은, 언론 개혁부터 시작돼야 한다. 올곧은 목소리를 내다 쫓겨난 이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테고,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치들은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언론계의 자성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한 앵커가 ‘텀블러’나 ‘국산차’를 운운하며 ‘비판을 위한 비판’을 내뱉은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김원우의 단편소설 <小人國(소인국)>에는 기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는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의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를 ‘치통환자’라 칭하며, ‘그런 일이야 적당히 쓰다듬어야’한다는 ‘소인’들의 태도에 진저리친다. 많은 이들이 김수영의 시를 읊조릴 때 이 작품이 떠올랐던 건, 화자의 ‘썩어빠진 어제’가 우리네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탓이다. 그는 끝내 ‘작은 나라의 아주 작은 직분도 내팽개쳐버’리며 ‘소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우리 역시 치통과 ‘결별’하려면, ‘썩어빠진’ 이부터 뽑아내야 하지 않을까. 사회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언론이라면, 언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던 지난 겨울의 추위를 잊지 않았다면, ‘소인’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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