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사회부 기사를 다룰 때 필자의 가치판단은 명확했다. 가치판단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치우침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전취재나 직접취재 등을 하며 알게 된 사실들에 감정은 한편으로 더 흘러가곤 했다. 기사는 중립을 지키고자 했지만, 감정에서 중도는 없었다. 감정을 따라가기만 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이미 필자 안에서 가치판단이 끝나 있었다.

지하도상가와 부산시의 갈등은 첨예했다. 첨예했다는 표현이 이처럼 들어맞는 상황은 처음인 것 같다. 지하도상가는 상인의 생존권 보장과 상가 활성화를 원했고, 부산시는 법에 따라 기존 상인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넘어 감정적 갈등까지 겪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취재 당시 두 상반된 취재원들의 목소리는 격양돼 있었고, 서로 소통의 단절을 느끼고 있었으며, 깊은 불신에 빠져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몇 걸음만 옮기자 지하도상가가 늘어서 있는 구간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도상가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드물었으며, 몇몇 상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광복지하도상가상인회 회장 분은 두꺼운 자료를 넘기며 상황을 설명했다. 자료에는 타 시·도의 조례와 부산시의 조례를 비교한 것, 부산시의 규정 등 다양한 내용이 정리돼 있었다. 그 같은 자료를 보며 ‘생존’이 걸린 상황이라는 것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상가 활성화 방안이나 그에 따른 법적 내용이 주가 돼서일까. 필자는 감정의 동요 없이 현 상황을 조금 더 냉철하게 봤던 것 같다.

지하도상가 관련 부산시청 관계자와 연락이 닿았다. 입장은 확고했다. 지하도상가가 공유재산이기 때문에 기존 상인들에게 한해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지하도상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말도 틀린 건 아니니까. 이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감정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이성은 명확한 반면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갈피를 못 잡았던 감정의 흐름이 분명해진 건 한 상인과의 취재에서였다. “수익이 나서 안 나가는 게 아니라, 이대로 나가게 되면 대출 받은 것도 못 갚으니까 버티고 있는 거죠” 그 말에 ‘생존’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왔다. 부산지역의 지하도상가는 총 일곱 곳. 부산시설공단이 운영하는 지하도상가는 다섯 곳. 그 다섯 곳은 제각기 모두 사정이 달랐다. 하물며 같은 상가 내 위치에 따라서도 상황은 천차만별이었다. 누군가는 정말 이권을 위해 목소리를 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진실로 절실한 생존 문제일 수도 있었다. 취재의 끝에 필자의 이성은 부산시청의 주장에 근접했고, 감정은 상인들께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옳은 게 있는 걸까?’ 필자는 틈이 좁혀지지 않는 그 사이에서 양측의 입장을 알아가며 그 같이 생각했다. 옳고 그름의 구분이 어려웠다. 법을 지키는 것도 옳은 일이며,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것도 옳은 일이다. 위법은 그르며, 누군가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 역시 그른 일이다. 부산시와 지하도상가 측이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그들에겐 각자의 옳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옳음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 소통이 단절됐고 서로를 불신하게 됐다. 사실 필자는 기사를 써 낸 지금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그들의 옳음만을 관철하려 한다면, 상황은 더 첨예해질 것이란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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