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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당신의 청춘은 어땠나요?
장원, 황연주 기자  |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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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호] 승인 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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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우리 학교. 그 속에는 수많은 학생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그들의 청춘이 머물렀던 그 시절, 대학생활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부대신문>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각 시대별 졸업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날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선배님이 대학생이었을 때 전반적인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① 70년대
제가 입학하고 나서 5월 되기 전에, 그러니까 개교기념일 전에 그 때 벌써 데모가 있었어요. 그래서 각 학생들이 학교에 집단으로 못 모이게 하려고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등교를 못하게 했어요. 휴교령이었죠. 저 같은 경우에는 생물과에서 채집을 보내주더라고요. 그래서 채집을 갔던 기억이 나요.

② 80년대
학과에서 합격통지서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선배들이 교지를 줬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학교 측에서 교지를 강제로 빼앗아 가더라고요. 뺏기던 당시에는 ‘군사정권 시대니까 가져가는 거겠지’ 싶었는데, 대학 생활을 하다보니까 ‘왜 들고 가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학생들과 전경, 백골단들이 교문과 부산은행에서 충돌을 했었죠. 학생들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경찰들은 그 목소리가 부산대 담장을 못 넘어가게끔 막아 선 거죠. 그러니까 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그에 맞서 경찰들은 최루 가스를 쐈었어요. 제일 처음에는 운동권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앞을 막았는데 나중에는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경찰들을 보고 일반 학생들도 같이 나와서 돌멩이 던지고 그랬죠.

③ 90년대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지금처럼 취업에 목을 맬 정도는 아니었어요. 졸업 후에 취업할 일자리도 있었고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거든요. 전공이 취업에 연계되는 지도 그 당시에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아니었어요. 90년대 초반에는 선배들이 취업 원서 5~6장 중 선택했을 정도였으니까요. 93~94학번이 졸업할 때쯤 IMF가 터져서 취업문이 확 좁아졌어요. 그 이후로 비정규직 제도가 등장하고 학교 내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확 가라앉았던 것 같아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저항과 공동체 등의 대학가 문화가 남아있었어요. 학교에 가면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자유를 만끽하면서 사회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던 기억이 나요. 데모도 많이 했고.

④ 00년대
2006년도에는 넉터가 지금보다 넓었고, 지금의 NC백화점인 효원굿플러스는 없었죠. 정문에 있는 시계탑도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강의실도 책상과 의자로 붙여져 있는 1인용 책상으로 돼 있었는데, 덕분에 수업을 빠지기 좋았었죠.(웃음) 아무래도 그때는 ‘1학년은 놀자’는 분위기라서 대리출석을 부탁한다거나 출석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또한 지금처럼 대외활동이 활발하지 않아서 토익이랑 면접만 준비해도 취직할 수 있었어요. 대부분 1~2학년 때는 막 노는 분위기였는데, 몇몇 학생들은 1~2학년 때도 열심히 공부했던 걸로 기억해요.

   
 

 

오늘날도 학교 내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데요. 선배님은 어떤 동아리 활동을 주로 하셨나요? 

 

   
 

① 70년대
저는 동아리 활동을 많이 한 편이었어요. 사진예술연구회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던 걸 졸업한 지 50년이 된 지금도 하고 있어요.(웃음) 사진 찍으러 외부로 촬영도 많이 갔었죠.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는 원정촬영이라고 해서 3박 4일, 4박 5일도 가고 그랬어요. 또 그 때는 버스 차장 분들이 대학생들에게 요금도 많이 깎아주고 그랬어요. 개교기념일에 써클 별로 포커댄스 경연대회가 있어서, 다른 동아리들이 모여서 춤을 췄었죠. 그 때는 속한 동아리가 없으면 여학생, 남학생들이 교제를 하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② 80년대
그 당시에는 취업 관련 동아리가 별로 없었어요. 저는 마산에서 온 마산 중앙고와 마산 제일여고로 구성된 동문 동아리에 속해 있었는데, 밤새 술 마시고 놀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돈 천 원씩 모아서 서면 나이트클럽 가고. 지금 생각나는 건 대학 2학년 때 저는 자고 있는데 친구가 발로 차더라고요. 밤 12시 돼서. ‘야, 춤추고 싶다’ 하길래 ‘그래, 가자. 어디가고 싶니’이랬죠. 그래서 기숙사 담을 뛰어넘고, 학교 정문을 뛰어 넘었죠. 돌아다니다가 새벽에 또 담 넘고, 기숙사 담 넘어서 다시 들어가고.(웃음)

③ 90년대
각 단과대학마다 학회와 문예 동아리가 있었는데, 학회는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사회참여 의식을 갖추는 곳으로 지성인으로서 가치관을 세우자는 취지였죠. 문예 동아리는 풍물, 노래패 등이 있었고, 큰 행사에는 같이 연합해서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또 그때는 지금과 달리 고등학교 출신의 동문 동아리가 활성화돼 있었어요. 미리내골 옆에 제법 놀 공간이 많았는데, 거기 꽂을 푯말에 넣을 동문파크를 만들기도 했어요. 주로 동문 동아리는 남고-여고가 연합해 진행했죠. 친목도모도 하고 데모를 많이 했었죠.

④ 00년대
저는 주로 학과 동아리에서 활동한 것 같아요. 지금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다른 건 없어요. 특히 수학과의 경우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과가 아니다보니 동아리를 하지 않아도 다같이 재밌게 놀았던 것 같아요. 그 때는 지금의 카카오톡 단체 톡방도 없었고, 싸이월드 카페에 행사 공지를 했죠.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싸이월드 카페에 초대됐어요. 같이 놀 때마다 싸이월드에 사진올리고 그랬죠. 2006년에 과 단체로 독일 월드컵 단체 응원하러 간 것이 기억에 남네요.

 

시대가 많이 변한 것처럼 수업 방식도 지금과 달랐을 것 같은데요.

 ① 70년대
수업 방식은 교수님이 하는 강의가 주였어요. 전공 서적은 원서를 썼는데 러시아 원서나 뭐 그런 건 아니고, 주로 영어로 된 전공 서적으로 수업했어요. 수강신청은 3월에 학기 시작 전 2월 쯤에 등록을 하러 갔어요. 가서 내가 무슨무슨 과목을 듣겠다고 그 과목 교수님 성함을 찾아서 등록하면 됐어요.
우리는 과 정원이 20명이어서 군대에 간 남학생들을 제외하면 보통 한 15~16명으로 수업했어요. 교양은 지금 없어진 본관 원형 건물에서 이뤄졌는데, 수업 듣는 인원이 거의 100명이 넘었죠.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처음으로 전부 다 모아놓고 하는 성교육도 했어요. 그 때 1학년이 1150명이었는데, 그렇게 전체 다 모아서 하는 교육도 자주 했던 걸로 기억해요.선배님 시절에는 어떤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나요?
 제 지도교수님은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유별 나셨어요. 매번 토요일마다 만나서 재료관에서 영화도 한 번씩 보여주시고, 동네 산성이라든지 같이 올라가서 막걸리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좋았다고 생각 드는데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인데 매번 토요일마다 와서 시험 치자! 그러니까 그 땐 별로 안 좋았죠.(웃음) 

② 80년대
수업은 고등학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큰 강의실에서 수업을 했고 특히 수학과는 실험실습보다는 오로지 분필로만 수업했던 기억이 나네요. 딱딱하죠, 수업 듣기에. 그러니까 수업 듣기 싫어했던 사람들은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 마시고 수업 안 들어가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교수님들도 터치를 안 했고요. 또 저는 2학년 때 총대를 맡았는데, 그 당시 총대의 가장 큰 덕목은 수업 땡땡이 잘 치는 거였어요.(웃음)
제 지도교수님은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유별 나셨어요. 매번 토요일마다 만나서 재료관에서 영화도 한 번씩 보여주시고, 동네 산성이라든지 같이 올라가서 막걸리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좋았다고 생각 드는데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인데 매번 토요일마다 와서 시험 치자! 그러니까 그 땐 별로 안 좋았죠.(웃음)
수강신청은 각 학년들이 한 곳에 모여 과목, 수업 시간, 학점, 교수님 이름이 빽빽하게 있는 종이를 찾아서 교양과목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어요.

③ 90년대
교수님들이 거의 다 칠판에 판서를 하셨고, 학생들도 직접 필기했어요. 아니면 프린트 물을 나눠주고, 그것을 토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한 장씩 사진 넘기는 슬라이드 영사기를 시청각 교육이 필요할 때 쓴 것도 기억나요. 그때는 공부 잘하는 선배들이 만든 족보를 어떻게든 구해서 복사하기도 했죠.
1996년은 PC통신이 나오던 시절이었어요. 학교 전산실이 인터넷 속도가 제일 빨랐어요. 그래서 수강신청 기간에는 줄서서 기다렸던 걸로 기억해요. 전산실에서 자리를 못 잡으면 컴퓨터 있는 친구 집에 가서 하거나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선동열 방어율’, ‘쌍권총’, ‘F학점 첩보원’이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모두 학점과 관련된 말이었죠. 그 당시에는 수업을 안 듣는 학생이 많아서 한 사람이 목소리를 바꿔 대리 출석한 적도 많았어요. 교수님이 낌새를 느낀다 싶으면 자리를 살짝 옮겨 말하곤 했죠.(웃음)

④ 00년대
교수님들이 주로 판서를 하셨죠. 전공은 지금처럼 PPT를 통해서 수업을 진행하기보다는 교재를 수업을 대부분 이용했어요. PPT는 거의 교양수업 시간에 다뤄졌죠.
그때는 재수강이 D+이하부터 가능했기 때문에 C를 받은 사람들이 교수님께 성적을 낮춰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던 걸로 기억해요. 04학번까지는 성적 삭제가 가능해서. 다시 A+을 노릴 수도 있었고요. 우리 때는 재수강을 하면 B+까지 밖에 못 받았지만. 수강취소도 중간고사 치고 나서 할 수 있어, 중간고사를 못 치면 수강취소하고 다 튀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당시에는 졸업기준으로 토익점수나 졸업시험도 아예 없었어요. 단지 필수교양을 이수하는 것뿐이었죠.

 

요즘은 카카오톡으로 약속 일정을 공지합니다. 선배님은 어떤 방식으로 연락하셨나요?

 

   
 

① 70년대
휴대폰이 없는 시절이잖아요. 학교 게시판을 들여다 봐야 했어요. 대학 처음 들어가서 제일 아쉬웠던 게 고등학교 때는 조례나 종례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갑자기 없어지니까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게시판이 아니면 교내 방송에서 한 번씩 알려주는 경우도 간혹 있었어요.
동아리 활동 연락 같은 건 나무나 길목에 붙였어요. 어디 붙여놓는다고 딱 약속이 돼 있었죠. 사진부 같은 경우에 암실에서 연락이 다 됐어요. 근데 또 그 때는 모든 동아리가 동아리 방이 있는 게 아니라, 바위에 공지글을 붙여 놓았죠. 또 구름다리 넘어서, 콰이 강의 다리 건너서 바위에는 특정 동아리 지정 자리이기도 했어요. 그래도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휴대폰 없다고 연락 안 되고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요.

② 80년대
공지사항은 각 학년 대표(총대)가 조교선생님에게 연락을 받아 학과 게시판에 붙여서 알렸어요. 핸드폰도 없고 카톡, 밴드도 없으니까 동아리 모임 등을 알릴 때는 모임내용, 시간 등의 글을 직접 써서 복사했어요. 그걸 들고 또 새벽에 학내의 게시판 및 나무 등에 붙였던 기억이 나요. 그 때 전화는 고작 공중전화밖에 없었어요.

③ 90년대
제가 고등학생 때 삐삐가 나왔어요. 급하게 연락해야 할 때는 음성메시지 대신 8282를 호출해 보내기도 했고, 평소에는 음성메시지를 모아둬서 한번 씩 공중전화에 가서 들었어요. 그때는 느림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삐삐를 안 가지고 온 경우에는 그 사람이 가 볼만한 장소를 직접 찾아다니기도 했죠. 그때 학교 정문 앞에 나라사랑(나사)이라는 사회과학 서점 밖 게시판에 쪽지로 약속을 적어놓은 적도 있었는데. 그 쪽지를 보고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죠. 학과 행사나 성적표는 학과 건물 강의실 옆에 학과 게시판에 종이를 붙여 놨었는데 집으로 모두 배송이 돼서 성적표를 빼돌리려고 고생 좀 한 것 같네요.(웃음)

④ 00년대
그냥 건물 중앙에서 모인다거나, 수업 끝나면 우루루 같이 나갔던 것 같아요. 단체 약속 잡을 때도 각자 전화통화로 약속 일정을 전했던 걸로 기억해요. 1학년 때는 과방이나 동아리 실에 다 있어서 딱히 약속 전달에 불편하지 않았죠.


그 시절 학생들은 주로 어떻게 등교했나요?

① 70년대
그 당시 등교 방법은 다 버스죠. 저는 서면에서 살아서 한 30~40분 쯤 걸렸었던 것 같아요. 대연동 이런 데 사는 사람들은 51번 버스를 탔어요. 그 땐 지하철도 없었죠. 버스 노선도 오늘같이 이렇게 많지 않았어요. 18번, 19번이 황금 노선이었죠. 또 영도, 영선동 다니는 82번, 그 다음 송정에서 오는 게 100번. 그런 버스가 있었어요.
그래도 요새같이 사람들이랑 차가 많지 않아서 밀리고 그런 건 없었어요. 대신 시내버스가 가다가 좀 오래 섰다 가는 곳이 있었어요. 버스가 손님이 좀 있는 정류장 같으면 거기서 좀 더 서 있었어요. 바로 가지 않고요.

② 80년대
저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해서 그냥 걸어서 다녔고 제 입학할 당시 지하철 1호선이 처음 생겼어요. 서면까지 운행됐죠. 이후 하단, 신평 등 먼 거리의 친구들도 이용하게 됐어요. 제대 후에는 조금이라도 방세가 싼 자취방을 구한다고 장전동을 넘어 부곡동, 구서동까지 방 구한다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나네요. 예전에는 부동산이 없어서 전봇대에 붙은 벽보를 보고 방을 구했어요. 핸드폰도 없을 때라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하고 집을 찾아갔어요.

③ 90년대
통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울산, 김해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진주, 통영, 창원에서 온 친구들은 대체로 자취했던 것 같아요. 기숙사가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니까 학생들이 자취를 많이 했고 친척집에서 오는 경우도 있었죠. 대부분 자취방은 구정문과 북문에 많이 있었고, 한 달에 5~10만 원 정도로 내서 보증금은 없었어요. 사글세 비슷하게. 자취방이라도 지금처럼 화장실이 따로 있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④ 00년대
2006년에 대중교통이 환승되기 전이라 순환버스를 타지 않고 학교까지 걸어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지금처럼 버스 안이 미어터질 정도는 아니였죠. 그때 장림, 다대포, 영도에서 통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환승이 안 되니까 교통비가 엄청 많이 들었어요. 그때 기숙사는 웅비관이 없었고 자유관과 진리관 두 군데 밖에 없었어요. 기숙사하는 친구 방에 몰래 들어가 잔 적도 많았는데.(웃음) 그리고 북문에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자취방이 싼 편이었어요. 방 5개의 화장실 1개 있는 싼 집이 많아서 자취방을 구하는 데 부담이 있지는 않았죠. 그때 당시 아침밥을 준비해 주는 하숙집이 조금은 남아있었지만, 점점 사라져 간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① 70년대
학교 식당을 주로 많이 이용하고 도시락도 싸 다녔어요. 가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요즘 치면 바깥에서 먹는 거 한 절반 정도 수준 안 됐겠어요? 그 때 버스비가 20원 정도 했어요. 제가 또 사실은 맥주라는 걸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어요. 부산대학 앞에 맥주집 그런 게 없었거든요. 학교 밑에 내려가면 막걸리집이 있어서, 막걸리를 마셨죠. 그냥 가서 먹는 게 아니라, 다른 과나 다른 반 학생들 하고 내기 배구를 했어요. 그래서 진 팀에서 돈을 내고 같이 가서 막걸리 마셨죠.

② 80년대
마산에서 와서 기숙사나 자취 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밥을 먹거나 상식(밥을 정기적으로 사 먹는 것)을 했던 기억이 나요. 학교 식당은 300원 정도 했죠. 리필도 다 되고, 문창 식당 분이 우리 학교 선배라 배고파서 밥 달라고 하면 다 줬어요. 저는 덩치가 있어 식사의 질보다는 양을 추구했죠.(웃음) 당시 600원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던 식당이 생각나요. 학외에 공식적인 식당은 아니고, 집에서 이젠 가정식이라 하죠. 지금 뷔페식 비슷하게 밥 이만큼 해가지고. 또 우리는 밥값 아껴서 술 마시자 쪽이라 밥 먹을 돈 아껴서 밤에 술 먹고. 아침은 굶었던 기억이 나요.

③ 90년대
지금처럼 학교 식당이 4곳 있었어요. 그중 샛벌회관에서는 특별하게 떡볶이를 팔기도 했어요. 이외에 나머지 학교 식당은 소고기국밥, 쫄면, 비빔밥을 팔았던 걸로 기억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문창회관 돈까스예요. 아저씨가 아침에 직접 돼지를 두드려 만드는 것을 보곤 했죠. 돈까스가 나오는 날에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토요일마다 고등어조림, 제육볶음, 채소는 마음껏 줬는데 그것도 인기가 많았어요.

④ 00년대
1학년 때는 선배들한테 다 얻어먹어서 밥값이 하나도 안 들었어요. 주로 점심 먹으러 고추 불고기를 먹으러 북문에 갔던 기억이 나요. 또 막걸리 먹으러 산성에 많이 갔죠. 그때 인기 있던 학식메뉴는 문창회관의 화요일 돈까스가 유명했죠. 개인적으로 학교식당 밥은 샛벌회관에 짬뽕라면이 맛있었어요. 그때 학식은 2,000원, 북문도 2,5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비싼 메뉴도 3,000원으로 다 해결 가능했죠. 기억에 남는 북문 음식점이 많네요. 아참, 뉴숯불도 바뀌기 전이 더 맛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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