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왜 빨갛게 보일까?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사과가 빨갛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뉴턴은 스펙트럼으로 나눠진 빛은 다시 프리즘에 통과시켜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눠진 빛을 렌즈로 모두 합하면 원래의 백색광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색은 백색광 속에 들어있으며, 사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다. 뉴턴은 실험결과를 1704년 왕립학회에서 <광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광학>은 수학과 실험을 통해 증명된 내용을 담고 있어 빛에 대한 이전의 어떤 주장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라틴어가 아닌 쉬운 영어로 쓰여 예술가와 같은 대중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광학>은 당시 과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색채에 대한 모든 비밀을 밝혀낸 것은 아니었다. 뉴턴이 알아낸 것은 색의 비밀이 물체에 있지 않고 바로 빛 속에 있다는 것일 뿐 파장이 620~750nm인 전자기파가 왜 우리 눈에 빨간색으로 보이는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 파장의 빛이 빨갛게 보이는 것은 물리학의 영역이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문제였다. 이것은 2015년 인터넷에 ‘파-검 드레스 논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같은 드레스 사진을 두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파란색에 검은색 무늬가 있는 드레스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은 흰색에 금색 무늬가 있는 드레스로 보였다. 같은 사진을 두고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논쟁이 일어나자 어도비에서는 포토샵의 색 추출을 통해 파란색-검은색 드레스라는 것을 밝혀냈지만 명쾌한 답은 아니었다. 어도비에서 한 일은 단지 물리적인 색을 구분한 것일 뿐이며, 답은 색을 인식하는 방식인 색각(Color sense)에서 찾아야 했다. 같은 파장 대역 즉 물리적으로 같은 색이라고 하더라도 주변의 색이나 그 사람의 기억 때문에 색은 다르게 인식된다. 같은 물체라도 주변의 배경이 색이나 광원에 따라 다른 색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컬러 사진을 오래 응시하고 나서 바로 흑백 사진을 보면 흑백사진이 컬러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친숙한 사진은 색이 제거되더라도 뇌가 그 색을 기억하고 있어서 색을 알아보는 기억색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빨간 사과를 보고 빨간색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빨간색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리적 빨간색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빨간색은 다른 색과 비교에 의한 것일 뿐 절대적인 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사람에게 빨간색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러한 사실은 짐작했던 뉴턴도 <광학>의 마지막 부분에 색의 인식에 대한 의문을 남겼고, 이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바로 괴테였다. 괴테는 <파우스트(1831)>를 쓴 독일의 대문호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괴테 자신은 문학가보다 과학자로서 자신의 업적이 더 위대하다고 여겼다. 괴테도 뉴턴과 마찬가지로 프리즘을 이용한 광학 현상을 관찰한 후 <색채론(1810)>을 펴냈는데, 수학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과학자들에게는 완전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세상을 직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괴테의 ‘색채론’은 화가들에게는 환영받았고, 1941년 하이젠베르크가 논문으로 재조명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된다. 미신과 비이성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빛을 준 것이 뉴턴이었고, 세상을 생태적이고 직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괴테였다. 이 두 관점이 합쳐서 우리는 색채에 대해 더욱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선거철이 되면 항상 불거지는 색깔 논쟁. 뉴턴과 괴테의 인식 차이처럼 후보를 어떤 색깔로 보는 지는 후보의 성향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인 셈이다. 후보를 어떤 색으로 보더라도 그 근본에는 변화가 없다. 통합적 관점을 통해 색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듯 후보에 대한 색깔 논쟁보다는 기본 자질을 검증하는 데 치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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