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어떻게 죽는가. 죽음에 이르는 비일상적 폭력에 익숙하다면 당신은 너무 많은 영화를 본 것이다. 내가 그 부류의 인간이다, 아마 당신도. 영화가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인 죽음을 가장 즐길 만한 구경거리로 삼은 것은 오래된 일이다(죽음이 반드시 비극만은 아니라는 견해는 또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하니 일단 접어두자). 그 점에서 영화는 꽤 야만적인 예술이다.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죽음이 스펙터클이 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이 좀 까다롭다. 이를테면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폭력적인 영화가 곧 나쁜 영화는 아니며, 영화에서 폭력이 반드시 폭력으로 인지되는 것도 아니고, 생략된 폭력이 적나라하게 재현된 그것보다 덜 끔찍한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폭력의 재현은 복잡미묘한 질문들을 낳는다. 요컨대 폭력은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다.

최근에 접한 한 편의 미국드라마와 두 편의 영화는 매우 극악한 폭력 재현으로 내 시선을 끌었다. 너무 난폭하여 장르를 불문하고 공포영화가 되어버린 폭력. 본 순서대로 말하자면, 첫 번째는 미드 <왕좌의 게임>이고 나머지 두 편은 전쟁영화 <핵소 고지>와 슈퍼히어로 영화 <로건>이다. 여기엔 공히 미성년자관람불가 수준의 신체 훼손과 대량 학살이 등장한다. 표면적(시각적)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의도와 효과에서는 절대 같지 않은, 그 작품들을 나란히 놓았다. ‘그래서 그 폭력들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았다.

<왕좌의 게임>을 시즌 6까지 보았다. 시즌 1부터 꽤 충격적이었는데, 관람연령이 명기되는 영화에서도 그런 살벌한 폭력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 TV에서 방영한다고? <왕좌의 게임>에서 인간의 육신은 푸줏간의 고깃덩이 마냥 썩둑 잘리고, 머리는 두부처럼 으깨지고, 신체 장기는 로드킬 당한 짐승마냥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 폭력적 재현에는 인간의 육체를 물화한 냉담한 시선과 한계 없는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근거리에서 적의 얼굴을 마주하며 칼로 맞서던 시기의 전쟁은 멀리서 총과 드론 폭격으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보다 훨씬 잔혹하고 적나라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폭력은 무얼 말하기 위한 것인가? <왕좌의 게임>의 치 떨리는 폭력은 전근대 제국주의 전쟁의 야만성을 지시하지만 실은 이 드라마가 지닌 스펙터클의 요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몇 세기 전 광장이 기요틴에 처형당하는 자들을 구경하려는 숱한 군중(관객)을 위해 마련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우리는 광장의 공개처형을 스크린으로 감상한다.

<왕좌의 게임>이 순수한 스펙터클을 위해 폭력 재현을 인명 경시의 수준까지 밀어붙였다면, <핵소 고지>의 폭력 재현은 좀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는 종교적 이유로 총을 들기를 거부한 인물이 2차대전에서 75명의 인명을 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했던 주검의 퍼레이드. <핵소 고지>에서 인간의 사지는 폭격으로 찢겨 허공을 날아다니고 화염에 싸여 불타오른다. 그게 인간의 육체가 아니었다면 필경 아름답다고 말했을 법한 광경이다. 전장은 곧 지옥이라는 메시지를 타전하는 이 살상 장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수의 인명을 구한 어느 전쟁 영웅의 공헌을 허무한 것으로 돌리는, 재현의 역설에 다다른다.

<핵소 고지>의 숭고한 영웅이 폭력적 재현에 압사당하는 동안, 슈퍼히어로 울버린의 마지막 전장은 피로와 고통으로 가득했다. 엑스맨 시리즈의 R등급 영화 <로건>은 어른들을 위한 블록버스터다. 잔혹한 신체 훼손이 대거 있으니 애들은 가라, 가 아니다. 초영웅 울버린이 아니라 늙고 병든 인간 로건의 회한과 죄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을 만큼의 피로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고통이 무언지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만한 연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액션이 주는 쾌감의 자리에 존재론적 비애감이 스며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로건>의 극악한 폭력 재현은 불가피한 인간 삶의 본질적 속성이자 은유로 보였다. 결국 영화에서 폭력은 물리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문제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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