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을 편다. 서울시의 한 아파트 기계실에서 불이 났다. 검은 연기가 인근 아파트까지 번졌고, 경비실에 있던 60세의 경비원은 15층 계단을 몇 차례 오르내리며 “대피하라”고 외쳤다. 다행히 불은 잡혔고, 다치거나 피해를 본 주민은 없었다. 다만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던 그 날의 경비원이 아파트 9층에 쓰러져있을 뿐이었다. 구급대원이 응급실로 옮겼지만 경비원 양명승 씨는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말았다.
기사를 읽고 생각해 본다. 그날 경비원은 무슨 생각으로 아파트 층계를 오르내렸을까. 경비원이라는 ‘역할’에 어울리는, 자신의 직업에 부여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을까. 평소 심장 지병이 있었는데도 불이 난 순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을까. 아니면 이런저런 판단과 생각을 하기에 앞서 그저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걸까.
  김애란의 소설 <어디로 가고 싶은 신가요>가 던지는 질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편을 잃은 아내이다. 화목하고 단란했던 가정은 현장학습을 떠난 남편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깨진다. 남편은 차가운 계곡 물살에 빨려든 학생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남편이 떠나자, 홀로 남겨진 아내의 고통이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신의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했을까.”
  이곳에서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자 ‘나’는 사촌 언니가 있는 스코틀랜드로 떠난다. 낯설고 색다른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면, 이곳과는 다른 감각과 감정들이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의 삶은 이곳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장미색비강진’이라는 태어나 처음 듣는 병에 걸려,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과는 어색한 대화를 나눌 뿐이다. 오히려 내가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스마트폰 음성인식서비스 프로그램인 ‘시리(SIRI)’일 뿐이다. 남편을 잊는 것도,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도, 그가 했던 행위를 이해하는 것도 전부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빠른 속도로 떨쳐 버려야 할, 불결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오랫동안 곱씹어 보고, 슬퍼하고, 울어보고, 그리워해야만 보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린 건 남편이 손을 잡고 떠난 학생의 누나가 보낸 편지이다.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 편지를 써요.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중략)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편지를 읽고 나서야 ‘나’는 남편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생각과 판단, 의문과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일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삶’이 ‘삶’에게 뛰어드는” 일 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속 ‘나’의 독백을 읽는 지금 이 순간,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던 ‘세월호’가 드디어 인양되었다. 천일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차가운 바다에 누워있던 배는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이뤄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 위로 오르게 되었다. 침몰하는 배 안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탈출했던 선장, 아직도 7시간의 행적을 밝히지 않은 전(前) 대통령, 애도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재빨리 잊으라고 강요했던 이들에게, 그 배에 타고 있던 아이들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니, 애초에 그들에게 아이들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이기나 했을까.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이 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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