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알람은 아니었다. 익숙한 울림이 낯선 시간대에 찾아왔다. 환기하기에 제격이지만 딱히 효용은 없었다. 의무감이었을까. 필자는 이미 TV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11시. 재판관들은 차분함을 유지한 채 선고문을 낭독했고, 이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언했다. 2002년 월드컵, 2008년 올림픽 때나 들을 수 있었던 이웃의 환호가 겹쳐왔다. 메신저도 끊임없이 울려댔고, 타임라인은 관련 포스팅이 장악했다. 동류의 환희가 공기나 전파를 통해 나라를 뒤덮었다. 허나 필자는 그와 함께하지 못했다. 안도가 앞섰기 때문일지도, 소수의 광분이 두려웠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뻤지만, 기쁘지 않았다.
 

이질감이었다. 교과서로나마 겪었던 역사는 지금과 달랐다. 우리는 일제의 강점을 끝낸 것도, 독재정권의 막을 내린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 손으로 뽑았던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탄핵했을 뿐이다. 물론 기념비적이기는 하다. 지난 후회와는 별개로, 부적합한 자를 직접 심판했으니 말이다. 수백만의 촛불은, 까딱이나 하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을 움직였다. 헌법이 유효하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확이지 않을까. 어쨌거나 미래의 교과서는 오늘을 역사적인 날로 기록할 것이다. 그럼에도 약간의 착잡함은 숨길 수가 없다.
 

부끄러움과 반성은 우리 몫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애초에 악랄했잖은가. 인사 잡음은 끊이질 않았고, 그네들만의 창조경제 덕에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증세 없는 복지’는 어디로 갔는지 아래로부터의 증세가 수차례, 사회복지 공공지출은 이와 반비례했다. 소위 ‘초이노믹스’라 불리는 기이한 경제정책은 친재벌 정부의 특권놀음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따위의 정책과 메르스 사태, 조류독감 사태 때의 대응은 그의 치졸함과 무능함을 드러냈다. 뿐이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조악한 국정교과서와 한일위안부 협상에는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일었다. 진도 앞바다는 1060일 째 차다. 그런 지가 무려 4년, 1475일. 그 긴 시간동안 우리는 이를 손 놓고 바라봤다. ‘가만히 있으라’는 망령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이제야, 겨우 끝났다. 우리 덕이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할 일이 태산이다. 우리가 미뤘던 것이기에 혹자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선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명제를 증명해야한다. 추악한 진실이 민낯을 드러냈지만 숨겨진 것들도 여전할 테다.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들도 함께 소탕해야한다. 몰상식의 정상화 역시 필요한 일이다. 종일 읊어도 모자랄 만큼 악랄한 정책들이 넘쳐난다. 되돌릴 것은 되돌리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행동해야한다.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다. 대선이 목전이다. 달라져야한다는 점은 명확하기에, 신뢰할만한 이를 가려내야한다. 보고, 듣고, 읽고, 또 생각해야한다. 그 다음이 투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마따나, 우리는 이 과정을 모두 끊임없이 감시해야한다. 그네들에게 유일한 공이 있다면, 정치가 우리네 사정임을 절실히 깨닫게 해준 것 정도일 테다.
 

‘바람에 꺼진다’던 촛불이 온기를 더했는지 봄기운이 제법 느껴진다. 매서운 추위에 몸 사리던 봄이, 이제야 오고 있다. 따스함이 이내 익숙해질 즈음 우리는 새로운 기로에 선다. 오늘마냥 객쩍은 알람이 울릴 때, 혹 진짜 봄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추위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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