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4년 3월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문화영상학과에 임용됐다. 이제 막 3년밖에 되지 않은 새내기 교수이다. 부산대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며 여러 가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지만, 그중에서도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이 학교가 그야말로 무척 거대한 종합대학이라는 점이었다. 교수가 천 명이 넘고, 학교 안에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건물들도 숱하게 많다. 내가 다녔던 대학과 강의를 나갔던 대부분의 학교들은 미술대학 혹은 예술대학이 중심이 된 소규모 학교들이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학과와 단과대학이 있는 부산대학교와 같이 대규모의 대학에서, 예술대학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미미했다. 처음 임용되었을 때 참여했던 신임교수연수회에서는 심지어 “예술대학이라는 것도 있나요?”라는 말을 들었다. “미학을 전공하셨다는데, 미학이라는 것도 학문인가요?”라는 말도 들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우리 학교에 예술대학이 있었구나, 미학 전공자라는 것도 있었구나 하실 분들이 계실 것이다.
 처음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만큼 ‘내 전공이 보편적이지 않은 분야구나’하고 이해하게 됐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규모나 인지도를 떠나서 예술대학의 특수성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계량적 평가나 기준이 동원되는 분야에 예술은 처음부터 들어맞지 않는다.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고,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이 분야에서는 정답도 없고 매뉴얼도 없다. 단적인 예로, 교수 연구실적의 기준을 산출할 때 예술대학 내에는 ‘기준’에 맞지 않은 수많은 사례들이 발견된다. 나는 이론 전공이기에 인문학의 기준에 맞추면 되지만, 실기 교수님들은 사정이 다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배우는 것도 특수할 뿐 아니라, 졸업 후에도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에 몇 명이나 취직했는가 이런 기준으로 성과를 평가할 수가 없다. 모든 졸업생들이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술가를 지향하면서 학교에 들어온다. 그들은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이 도서관에 있을 때, 실기실에서,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운다.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영화를 만든다.
 단지 취업률이나 계량적 성과만을 놓고 예술대학을 평가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이런 풍토가 무척 아쉬운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인지자본주의를 연구해온 이론가 조정환은 새롭게 예술에 주목하여 <예술인간의 탄생>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그는 푸코가 말한 신자유주의의 경제인간을 반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예술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예술인간’은 자기배려의 수행을 통해 주체성을 정립하는 유연하고 창조적인 인간형이다. 이것은 단지 예술가가 그런 인간형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술가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의 모델로 제시된다는 뜻이다. 21세기의 예술가는 더 이상 반 고흐 같은 고독한 천재가 아니다. 일례로 지자체에서 예술가들에게 레지던스 기회를 제공해주고 그 대신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게 하여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례를 생각해보라. 물질적 가치만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가 수준 높은 삶의 지표인 한에서, 오늘날 예술가는 삶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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