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수정된 지도 10년이다. 과거에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했어야 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결과다. 이전 맹세문이 내포하고 있던 전체주의적 가치와 군사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자리 잡았다.

맹세문도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어떤가. 자유는 물대포에 쓰러졌고 정의는 말발굽에 치였다. 국정농단의 주역이 ‘민주주의’ 특검을 외치며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고 있다. 배가 침몰할 때도, 촛불이 광화문을 밝힐 때도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질 않았다. 정치가 예능보다 재밌어진 지는 오래다. 말마따나 ‘이게 나라냐’ 싶다. 그 와중에 눈에 자꾸 거슬리는 것이 있다. 학교 행사 날, 혹은 국경일에나 볼 수 있었던 태극기가 ‘애국’이란 이름으로 거리를 거닐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보고 있자니 ‘대통령이 잘못했을 지라도 나라를 망칠 순 없다’며 태극기를 들었다는 한 태극기 집회 참가자의 말이 떠오른다.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은 좋다만 어째서 그게 탄핵 반대 이유가 되나. 또 왜 그 손에 태극기가 들려있는 건가. 참으로 의문스러운 행태다.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이로 상징되는 것이 국기다. 간단하다. 태극기는 민주주의 국가, 즉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그런데 자칭 ‘애국시민’인 태극기 집회의 주체들은 박근혜 대통령(직무 정지)을 옹호하며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대한민국이 곧 대통령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국기인가. 민주주의 원리를 내팽개친 국가의 원수를 지키려 내세운 국기는, 대체 어느 나라의 것인가. 저 태극기에 98년 전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던 독립 운동가들의 자주독립 정신이나, 건곤감리에 깃든 민족화합과 조화의 상징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보수단체와 박씨 일가를 대변하는 깃발로 전락해버렸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바뀐 지 10년째다. ‘조국과 민족’에 서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부독재정권 잔재를 33년 만에 청산한 거다. 이제 국기에 대한 맹세는 대한민국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국가일 때 충성을 다할 것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필자는 이 맹세문을, 당분간은 절대 낭독하지 못할 것 같다. 이 곳에는 맹세문 속의 국가도 없고 이를 위한 영광도 없다. 차라리 10년 전의 맹세문이 더 어울리겠다. 그럼 우리의 애국시민들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종북 좌파 세력의 촛불을 끄려한다고 합리화 시킬 수나 있겠다. 물론 ‘자랑스런’ 태극기는 절대 아니다.

지난 3.1절, 군부독재의 향수에 젖어 박정희 전 대통령 가면을 쓴 자들은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반면 충성을 다짐할 민주주의 국가를 잃은 국민들은, 변질된 태극기의 상징이 껄끄러워 차마 태극기를 계양하지 못했다. 현 시국도, 얼룩진 태극기도, 말할 수 없는 국기에 대한 맹세도, 이 모든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 됐다. 애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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