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에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하 오스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영화인도 아니고, 인기도 없는 그 이름이 그리 자주 호명된 까닭은 그가 할리우드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그 영향이란 정치적인 것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트럼프에 대한 반작용 혹은 할리우드의 리액션이라 해야 할까. 일단 후보작과 수상작 리스트만 보더라도 예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흑인영화와 여성영화가 이토록 환하게 조명된 해가 또 있었던가. 지난해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는 비판도 의식한 것이겠지만, 그보다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다면 올해의 오스카 후보작 리스트는 지금과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날 트럼프의 정책과 이념은 정확히 그에 반하는 작품들의 노미네이트와 수상을 통해 정면으로 공격받았다.
  반-트럼프를 가치로 내건 올해의 오스카에서 트럼프는 조롱당하는 파쇼 광대였다. 무대에 오른 모든 이들이 한 번씩 치고 가는 동네북이었다. 블랙리스트의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에겐 새삼 신기한 광경이기도 하다. 그 탓에 시상식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신다. “저러면 국정원이 안 잡아가나?” 어머니는 CIA나 FBI가 당장 떠오르지 않아 국정원이라 했지만, 음… 국정원이라면 과연 실행에 나섰을 법한 일이긴 하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떠오르는 권력에 대한 할리우드의 반응은 ‘좌파의 본산’으로 낙인찍힌 한국 영화계로서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정권과의 맞장 뜨기나 과격시위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좌파영화에 투신해온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백인 부르조아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이며 국수주의적인 영화들이 할리우드의 요체를 이루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생래적 기질만은 확실히 좌파에 가깝다. 소수자를 옹호하고, 다양성을 지향하며, 차별에 민감하고, 차이에 관용적인(언제나 그래왔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게 옳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는) 그런 태도가 좌파적이라면 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인종과 성별, 국가와 종교에 우열을 두고 벽을 쌓는 트럼프의 정책은 (올해 아카데미 영화의 주조를 따르자면) 명백히 반-할리우드적이다. 아니, 반-영화적이라 해야 옳겠다. 아카데미 위원회의 말대로, 영화라는 예술에는 국경이 없고 단일 언어도 없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고, 그 모두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레드카펫 위의 드레스와 턱시도에 달린 ACLU(미국시민자유연맹)의 파란 리본(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를 표명하는 표식)은 예술이 곧 정치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시킨다. 그 파란 리본의 정치는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영화의 바람을 품고 있었다.
  올해 작품 경향에서는 그간 배제된 존재들이 흑인영화로 귀환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흑인 동성애자 소년의 성장담을 그린 <문라이트>와 NASA 엔지니어가 된 최초의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히든 피겨스>, 그리고 쓰레기 수거인이 된 전직 흑인야구선수와 그 가족의 이야기인 <펜스>에는 오바마 시대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흑인영화의 결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는 내게 흑인(영화)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첫 영화로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외국어영화상은 이란영화 <세일즈맨>에 돌아갔는데, 미 입국을 불허하는 7개국 시민들을 존중하는 의미로 시상식에 불참한 감독은 ‘세계를 미국과 미국의 적으로 나눈’ 트럼프의 공포정치에 대항하여 세계영화인들의 공감을 촉구하는 수상 소감을 보내왔다. 심지어는 차이와 편견을 디즈니식 우화로 풀어낸 <주토피아>에 장편 애니메이션상이 건네졌을 때, 나는 귀여운 토끼 경찰 주디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와 트럼프의 따귀를 날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아무래도 올해 오스카의 주인공은 트럼프로 기억될 것만 같다. 최소한 트럼프 시대의 할리우드는 레이건 시대의 하드바디 영화(근육질의 마초 우파영화)로 회귀할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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