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가 역사상 정권을 잡은 적이 있을까? 우리나라만 돌아보면 있을까 싶다. 중도라고 하면 본래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불신과 공격을 받기 쉬운데, 대한민국 정치사를 돌아보면 특히 심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과 통일한국을 모색했던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은 도무지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심지어 암살당하기도 했다. 본래 오른쪽에 많이 치우친 사람이었으나, ‘민족 앞에서는 어떤 이념도 무의미하다’는 신념으로 한반도 분단을 막아보려 애썼던 백범 김구 역시 ‘공산당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손가락질만 받은 끝에 비명에 갔다. 그 뒤로도 역대 선거에서는 여와 야 사이, 또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중도를 표방하며 이런저런 세력들이 고개를 들었으나 모두들 무참하게 짓밟힐 뿐이었다.
  그러나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중도가 집권한 사례가 적지 않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중도 노선을 취함으로써 쟁쟁한 공화당 거물들을 제치고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며, 결국 미국 제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 역대 최연소 수상인 윌리엄 피트(소 피트)도 휘그당 출신이며 휘그당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으나, 휘그당의 급진파들이 아집에 사로잡혀 국익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토리당의 지지를 얻어 1784년 총선에서 안정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정책으로 국민을 분열시킨 독재자들이 의외로 중도를 내세워서 집권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가 되는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의 2월 혁명 이후 노동자들과 재산가들의 극한 대립으로 나라꼴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 ‘나야말로 좌도 우도 아닌, 오직 프랑스의 안정과 영광만을 위하는 후보이다’고 어필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혼란을 거듭하던 독일 정치에 혜성처럼 나타나서는 보수 우익과 진보 좌익의 지지를 고르게 얻음으로써 1932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수상이 되어 독일을 나치의 악몽 속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었다.
  어째서 어떤 정치인들은 중도의 깃발 때문에 외면 받고, 어떤 정치인들은 그 덕분에 승리했을까? 잘 살펴보면 이유가 읽힌다. 첫째, 두 세력이 ‘우리가 승리하는 것보다 더한 가치는 없다. 아니, 승리하지 못할지라도 저놈들과의 공존은 거부한다’는 강렬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러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자’는 목소리는 파묻히기 마련이다. 링컨은 당시의 최대 이슈였던 노예제 문제에 대해 ‘반대한다’는 공화당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이왕 노예제를 실시하는 주들에게 간섭하지는 않겠다. 자칫하면 연방이 분열되고 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반면 그보다 당내 지분이 많았던 유력 후보들은 ‘노예제를 없애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노예제 문제는 덮고 넘어가자는 세력도 있었다. 그래서 ‘노예제에는 반대해야 해. 그렇지만 전쟁까지는 좀···’이라 여긴 다수의 공화당 대의원들이 링컨을 선택했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분위기가 훨씬 강경했다. 전쟁을 치르면 치렀지, 노예 문제에서 타협이란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가장 유력했던 후보인 스티븐 더글러스가 역시 중도적 입장을 내세우자 민주당 분당 사태만 초래했다. 해방정국 등에서 중도파가 몰락한 까닭도 지나친 흑백논리가 날뛰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성공한 중도파들은 두루두루 ‘저는 여러분께 최선은 아니겠죠. 그러나 차선은 되거든요’라는 어필을 했다. 루이 나폴레옹과 히틀러에 대해 좌와 우는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미는 후보가 되면 제일 좋지. 하지만 쉽지가 않아. 그러면 차라리 저 친구를 미는 편이 낫지 않을까? 우리 적이 집권하는 꼴을 보느니 말야’ 링컨도 공화당의 거물들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선전하지 않고, ‘그 대안’임을 강조했다. 반면 더글러스는 ‘나만이 민주당의 구세주’라는 식이었고, 따라서 반감을 사면서 최선도 차선도 되지 못했다.
  다시 선거의 시절이 돌아온다. 거리에서 어느 때보다 심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중도가 구국이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집권에 걸맞은 배경과 전략이 없는 중도라면 이번에도 외면당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중도가 정말로 구국인가, 차선인가에 대해 유권자들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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