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아기를 재우기 위한 여러 통과의례가 진행된다. 그중 마지막은 ‘자장가’ 부르기이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로 시작하는 고전적인 자장가부터 느리고 조용한 노래를 연달아 부르고 나면 아기는 잠이 든다. 자장가 리스트 중 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섬 집 아기>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나에게도 많이 불러주었던 노래. 그동안 이 동요의 가사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생각했는데, 곱씹어본 가사는 구슬프기 그지없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1절)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2절)”
  <섬 집 아기>는 1946년 한인현의 동시집 ‘민들레’에 수록된 동시였다. 이후 작곡가 이흥렬이 곡을 붙여 동요로 만들어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가사 속 아기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하루를 보내다 지쳐 잠이 든다. 아이의 주 양육자이자, 생활과 생계,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엄마이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부재 상태다. 엄마는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지만, ‘다 못 찬 굴 바구니’로 비유된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다. 아마도 엄마는 어떤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잠든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질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이나 해법이 없다는 점에서 답답한 현실은 미래에도 반복될 듯하다.
  <섬 집 아기> 속 암울한 상황은 기존의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과 장터에서 생선을 팔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를 추억하는 서정시로 알려진 박재삼의 시 <추억에서>는 위의 동요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라는 구절처럼 어린 오누이는 추운 골방에서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린다. 이제는 성인이 된 시적 화자는, 어머니의 한스럽고 애달픈 일상을 회고하는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철저히 외롭게 방치되어 있던 어린 날에 대한 쓰라린 체험이 깔려있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 속 상황도 비슷하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장에 나간 엄마는 해가 저물도록 오지 않고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숙제를 해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린다. 어린 화자는 급기야 “어둡고 무서워”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기까지 한다.
  <섬 집 아기>가 3인칭 시점에서 아기와 엄마의 상황을 전한다면 <추억에서>와 <엄마 걱정>은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흡사 두 편의 시는 <섬 집 아기> 속 아기가 커서 고백하는 자신의 불우했던 유년시절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안타까운 것은 위의 상황이 시와 동요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의 현실에도 수많은 아기가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홀로 남겨진다. 맞벌이 부부, 워킹맘, 슈퍼 대디, 슈퍼우먼 등 결혼한 부부를 가리키는 많은 단어 속에서, 아기들의 자리는 사라진다. 채 젖도 떼지 못한 아기가 어린이집으로, 조부모의 집으로 아침마다 옮겨진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다 못 찬 굴 바구니”와 “열무 삼십 단”, “남은 고기 몇 마리”를 팔기 위해 직장으로 나간다. 그것이 조금 더 잘 살기 위한, 조금 더 윤택한 미래를 위한, 모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 중에 아이와 부모의 자리는 ‘골방’처럼 차가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골방’이 ‘온돌방’으로 바뀐다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당하겠건만. 녹록지 않은 현실은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인터넷 검색창에 <섬 집 아기>를 치자, 연관검색어에 ‘섬 집 아기 괴담’, ‘섬 집 아기 공포’가 나온다. 자장가로 불러주기에는 동요 속, 동요 밖 현실이 너무나 엄혹하다.

오선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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