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라냐”. 국민의 심정은 이렇듯 처절하다. 최순실 덕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제는 또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깜깜하다. 실은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두 달째다. 앞으로 더 걱정이다. 암담하다.
박근혜 정부는 실패했다. 화가 난다. 또 안타깝다. 욕심 많고 예의 없는 강남 아줌마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만은 아니다. 시대적 소명을 간과해서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해 주었으면 했다. 바로 과거사 논쟁을 매듭짓는 일 말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이유는 이렇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유럽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여성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남녀차별이 심한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게 사뭇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두 번째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점이다. 왜 하필이면 민주화 투사도 아닌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이 부분을 참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여성 대통령론은 영 잘못 짚었다. 엄밀하게 보면 당시 국민은 ‘여성’이 아니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국민은 이명박 ‘같은’ 사람을 원했다. 그래서 이명박을 선택했다. 지난 대선에선 달랐다. 국민은 박근혜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박근혜’를 원했을 뿐이다. 필시 박근혜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총탄에 잃고 외롭게 살아왔을 박근혜에게 국민은 그만한 보상을 해 주고 싶었던 거다.
  저간의 사정이 이러했다면, 박근혜 정부의 시대적 소명은 분명했다. 산업화의 성공과 민주화의 희생을 명확하게 정리해 줄 필요가 있었다. 산업화의 그늘에 늘 민주화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 슬픈 과거는 아직도 우리의 미래를 가로 막고 있다.
  그래서일까. 때만 되면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패러독스에 갇혀 사상검증을 강요받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을 나누는 중요한 가늠자로 여겨져 왔다. 장관이라도 되려면 어김없이 커밍아웃을 요구받는다. “5.16은 군사 쿠데타입니까 혁명입니까?” 선거 때도 마찬가지다. 유행을 타듯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영웅으로 미화되었다가, 이내 곧 철권통치의 독재자로 격하된다. 언제까지나 박정희 콤플렉스에 시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단언컨대 박근혜 정부의 출범은 과거 논쟁을 청산하고 매듭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 아닌가. 그녀가 대통령으로서,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화해하고 보듬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서,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무고하게 희생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단언컨대 박근혜 정부는 이 말 한마디로 시대적 소명을 다 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박근혜 정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100%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제발 그런 의미이길 바랐다. 마늘주사를 맞던, 보톡스 시술을 받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달랐다. 박근혜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미화에만 앞장섰다. 유신 정부의 정당성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지자체마다 너도나도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우겠다고 나설 정도에 이르렀다. 뜬금없이 새마을 운동을 내세울 때부터 이미 실패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가 벌여 놓은 지난 4년 동안의 모든 정책은 물거품이 될 게 틀림없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삽질만 한 셈이다. 이로써 우리는 과거를 털어내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이제 또 얼마나 오랫동안 과거사에 얽매여, 사상검증을 받아야 할까.
  박근혜 정부는 실패했지만, 대한민국이 더 빛나고 있다. 치열할 만큼 붉고,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LED 촛불 덕분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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