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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그 한 문장을
  • 장철호(국어국문학 10)
  • 승인 2016.11.21 12:43
  • 호수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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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문장을

01.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중에 그것을 믿고 싶어질 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믿지 않는 채이다.
 그럼에도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밖에 없었다.
 그것이 현실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나의 기도는 무의미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다. 없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신을 믿지 않음에도 기도를 했다.
 내 눈앞에는 굳건한 벽이 서 있었다. 그 벽의 한가운데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벽이라고 생각했다. 닫혀 있다면, 가로막고 있다면, 열 수 없다면, 그것은 벽일 뿐이다. 그래서 그 문조차 벽이었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벽이었다.
 어쩌면 저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저 벽 너머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다. 내 앞의 벽은 내가 그 경계에 함께 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도할 뿐이었다. 부디 살아나기를.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나의 기도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신에게 바쳐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마음속의 목소리를 높였다. 간절히 바라도 바뀌는 것은 없으리라. 그래도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다. 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나처럼 기도를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벽 너머의 사람이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듯했다.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몹쓸 죽음이 이쪽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휙 낚아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한 만큼 신을 원망하게 될까?
 미안합니다,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이만큼 약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잖습니까? 나는 당신이 미울 겁니다. 나는 당신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있다면 저 때문에 저기 있는 저 여자를 데려가지는 마십시오.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다.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에 차가운 벽이 닿았다. 저 앞에 벽이 있는데 벌써 뒤쪽에 또 다른 벽이다. 나는 얼마나 비좁은 곳에 서 있는가?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 벽에 기대 있기로 했다.
 앉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의 다리에는 아직 힘이 들어가 있었다. 벽에 기댔지만 아직 선 채로 위쪽의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 어설프게 밝은 빛이었다. 마주보기 힘들지 않았다. 이런 빛을 보면서 눈을 감는 짓은 비겁하다. 그런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나? 아니, 정말 얼마나 되었지? 손목시계를 보았다. 벽이 나를 가로막은 시간에서 고작 10여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 지긋지긋하지만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막막했다.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아마 심장이 빨리 뛰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왜 이렇게 느리게 느껴질까? 왜? 왜? 왜?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것이 힘들 줄 알았다. 이럴 바에는 다른 데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찌 되었는지 나중에 듣는 쪽이 훨씬 낫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제 발로 여기에 걸어왔다.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느릿한 심장소리의 사이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 힘든 시간을 서로를 위로하며 견뎌내자는 사람들이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다.
 삶과 죽음이 뒤섞인 곳에 함께 서는 일을 허락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싸움을 해야 한다. 누구와 싸우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뚜렷한 듯했다가도 어느 틈에 모호해진다. 어쩌면 그래서 이 싸움이 더욱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왜인지 빨리 움직여지지 않는 머리를 돌리고 그쪽을 보자 그 생각이 틀렸음이 드러났다. 아는 얼굴이기는 했다. 그래도 나와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싸움을 하지 않는 길을 고르는 사람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마주해왔으리라.
 심장소리가 빨라졌다. 시곗바늘소리도 빨라졌다. 그제야 나의 시간이 뒤틀려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생각이 시간을 압도하여 나를 영원에 가까운 곳으로 이끌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입을 열어 말했다. 바싹 마른 입 안을 거쳐서 나온 목소리는 한껏 갈라졌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병실을 관리하던 간호사였다. 손에 큼지막한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것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요. 환자분이 수술 들어가기 전에 이걸 저한테 주면서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지난번에 약속했다면서요.”
 나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들었다. 종이에는 두 면이 있었다. 한 면은 새하얬으나 이상한 자국이 나 있었다. 바로 뒤집었다. 다른 면에는 검은 볼펜으로 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글씨임을 깨달았다. 나의 머리는 마치 처음 글자를 배웠던 어린 시절처럼 찬찬히 그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너무나 짧은 한 문장이었다. 고작 이것을 쓰는 데다가 이 큰 종이를 쓸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글씨가 엉망이었다. 유치원생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싶은 글씨. 다른 때 보았다면 헛웃음부터 나왔으리라.
 그러나 그 여자는 원래 이렇게 엉망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이렇게 된 것은 몸을 떨리게 하는 아픔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글씨는 엉망이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있도록 되도록 글씨를 크게 썼으리라.
 한 다섯 번쯤 다시 읽었을까? 나의 손에 들어간 힘이 그 종이의 끄트머리를 구겼다. 내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글씨를 번지게 했다.
“이게 그거냐. 이제 마지막이라고 남에게 남겼어? 뭐야, 바보같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눈물이 흘러나올 틈새는 그것만으로 막아지지 않았다.
 내 손에 들린 종이는 며칠 전에 나눈 약속의 결과물이었다.

02.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소독한답시고 뭘 뿌려야 했다. 그 다음에는 겉옷 위에 걸칠 위생복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손이었다. 나에게는 사람의 손을 보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재주는 없었다. 그러나 그 손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 병실에 누가 있는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 다음에는 책이 보였다. 나도 가지고 있는 소설책이었다. 나는 그 책의 작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내 집에 있는 그 작가의 모든 책에는 그 작가의 사인이 들어가 있다. 내 눈앞에서 작가가 사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인을 할 때 펜을 쥐고 힘차게 움직이던 손이 바로 처음에 내 눈에 들어온 흰 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하얗지는 않았다.
 그 뒤에야 나는 A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가 낸 책을 나에게 자랑하던 때 얼굴에 돌던 생기가 다 사라져 있었다. 하얀 것은 손뿐이 아니었다. 흰 손이 책장을 넘겼다. 나는 또 다시 A가 책장을 넘길 때까지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다 비로소 내가 온 목적을 떠올리고 말했다.
“……문병 왔는데.”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으니 A에게 안 들리지 않을까 싶어 다시 말하려고 할 때 A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봤다. 그 눈빛의 반짝임을 보고 나니 A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A는 창백하지만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구야. 요새 바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온다고 해도 며칠 뒤에나 올 줄 알았는데.”
“아는 사람이 그렇게 아프다는데 문병을 미룰 만큼 매정하지는 않지. 그나저나 책을 읽어도 괜찮은 거야? 난 들어올 때 위생에 신경 써야 한다면서 짐을 뺏겼는데.”
 A가 책을 조금 더 높이 들어올렸다. A가 누운 침대 옆에서 책의 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쌓여 있었다. 살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A의 책이었다. A가 대답했다.
“괜찮아. 이 책들은 모두 멸균작업을 한 뒤에 가져온 거야. 내가 꼭 읽고 싶다고 하니까 허락해주더라.”
“그나저나 병실에서 자기가 쓴 소설을 읽고 있다니, 무슨 뒤마 흉내라도 내고 있어?”
 말을 마치고 아차 싶었다. 뒤마는 말년에 자기 작품을 읽으면서 이 훌륭한 작품을 끝까지 못 읽을 것 같다면서 울었다고 한다. 나는 A 앞에서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은 셈이었다. 나는 한쪽 손을 들어 재빨리 내 입을 때렸다. 다행히 A의 기분은 나빠지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내 눈에는 내 글이 그렇게까지 멋지게 보이지는 않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뻔뻔하기는 힘들지. 게다가 벌써 다 읽은 지 오래고. 다 읽고 나서 다시 읽는 중이야. 읽고 또 읽고, 그러다 보면 보이는 게 있을 거 같아서. 아, 그래도 죽기 전에 자기 글을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할지도.”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이 병실에는 문병을 온 사람이 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면회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것이 환자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A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수술을 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수술이 성공할 확률도 그렇게 높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 없이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A의 웃음을 보고 마음을 너무 놓았기 때문이었다. A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았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A가 못 참겠는지 말했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말지?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니까? 기껏 찾아와서 혼자 침울해지면 어떡해?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을 만한 병도 안 낫겠다.”
 나는 얼굴을 폈다. 환자의 눈앞에서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짓은 좋지 않다. 어떻게든 딱딱해진 얼굴을 풀고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음, 막상 오니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뭐 따로 있나? 글 이야기밖에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글쓰기 때문에 알게 된 사이였다. 공통의 관심사라고 하면 글이었다. 만나면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서로가 쓴 글이 어떻고, 누가 쓴 글이 저렇고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있는 A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진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A가 아직은 먼 곳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러네. 할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기는 하지. 그러면, 내가 아까 한 헛소리는 넘어가자. 그건 정말 미안하다. 넌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 말도 안 하기는 껄끄러워서 하는 말이야. 그래, 그건 넘어가고. 어디 보자, 여태까지 네 이름으로 나온 책은 다 가져다 놨네?”
“말하자면 나의 전집(全集)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지.”
 A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살짝 불만스러웠다. 여기 이 책이 아주 먼 훗날에 나올 A의 전집에서 일부일 뿐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여태까지를 기준으로 잡으면 A의 글 가운데 출판된 것이 모두 병실 안에 있기는 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고 했지? 정확히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데?”
“음, 보자, 그러니까……. 가장 옛날 책부터 시작해서 최근 책의 책을 읽는 것을 한 바퀴라고 치면 이제 네 바퀴를 다 돌고 다섯 바퀴째를 달리던 중에 네가 왔네. 이제 책은 잠깐 내려놓을까?”
 A는 책갈피를 꺼내서 읽은 곳까지 표시를 해두고 책을 옆에 올려두었다. 나도 모르게 그 책에 담긴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읽은 때는 한두 달 전이었다. 문득 생각날 때마다 읽는 책으로 내가 A의 책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A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최근에 쓴 책보다 옛날 책이 더 마음에 든다는 소리를 좋아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도 읽었네. 네가 무슨 몇 십 년 동안 책을 꾸준히 낸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다 읽기에는 꽤나 벅찬 양이겠지. 게다가 아까 보니까 꽤 꼼꼼하게 읽는 것 같던데 그렇게 자꾸자꾸 읽어서 어쩌게? 신작을 준비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마지막에 한 질문은 스스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처음의 멍청한 질문과 달리 병이 나아서 작가 활동을 이어간다는 미래를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A는 고개를 저으며 내 마음을 짓밟듯이 말했다.
“신작이라……. 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나는 화를 낼 뻔했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환자에게 소리를 지르면 안 되었다. A는 그런 나를 보지 못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마치 글을 쓸 때처럼 입 밖으로 내보낼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새로 책을 쓸 때는 내 글을 다시 읽는 일은 드물어. 오히려 남이 쓴 글을 참고하는 일이 더 많지. 그렇다고 남의 글을 베낀다는 뜻은 아니고 먹어서 소화한 뒤에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쓴다는 느낌일까. 신작이라고 하면 내 옛날 글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비평가들이 도전적인 작가라고 그러더라. 물론 그 새로움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 하는 것에서 의견이 갈리겠지만.”
 내가 덧붙였다. A의 도전정신을 애독자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A는 여러 가지 시도를 글 속에 녹여냈다. 나는 읽을 때마다 감탄했다. 그것 때문에 어지러웠던 적도 많았다. A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내가 여태까지 해온 신작 준비와는 달라. 하지만 신작 준비라는 말이 아예 틀렸다고 볼 수도 없겠어. 비슷하면서 달라.”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뭐가 비슷하고 뭐가 다른지 나한테 제대로 설명해줄 거라고 믿어도 되겠지?”
 내 되물음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A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잖아. 그게 너한텐 어때 보여?”
“나오는 책마다 느낌이 확 달라지고 이게 같은 작가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너와 알고 지내는 나도 이러니까. 다른 독자들은 더 그럴걸? 어쨌든 일단 그게 굉장하다고 생각해.”
“그거 고마운 이야기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달라. 자기가 쓴 글이라서 그럴까? 읽어보면 하나같이 비슷해 보이거든. 늘 그랬어. 아무리 달라지려고 해도 어떤 그림자 같은 게 드리워진 느낌.”
“그런 게 있다고 쳐도 네 그림자겠지. 네가 쓴 글이니까 네 그림자가 스며들어가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 보통은 그런 걸 두고 작가의 개성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네. 아주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바보 같을지 몰라. 하지만 나는 그게 싫었어.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내 글은 언제나 바뀌지 않은 내 모습을 생각나게 하더라. 남 앞에서는 어쨌든 내 글이라고 자랑했지. 너한테도 그랬고. 그래도 쭉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벗어나려고 더 발버둥 쳤어.”
 A의 실험들을 보며 나는 감탄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생겼었다. 여러 시도를 하는 것은 갈채를 받을 만했으나 그 안에 어떤 강박관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프고 나니까 생각이 많이 바뀌던데? 그래서 나는 내 글을 다시 읽기로 했어. 물론 책으로 낼 글이니까 허투루 쓴 적이 없어. 다시 읽으면서 검토도 많이 한 글들인데, 그래도 시각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다르다는 소리가 있으니까 말이야. 다시 읽었어. 그리고 이렇게 내 글을 읽고 또 읽은 적이 없었어.”
 A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것은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A 또한 말을 꺼내면서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는 듯했다. 그래서 A는 자기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래서 어떻게 바뀌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네 글을 읽으면 어때?”
“역시 바뀌지 않는 건 있어. 그건 틀림없어.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안 들어. 마주해야 때가 온 거야.”
 A가 갑자기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은 한 가지로써 꿰뚫을 수 있다.”
“일이관지(一以貫之)? 갑자기 공자님 흉내냐?”
 내가 이죽거렸다. 아마 논어의 한 구절이었던가? 제자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떠올리려 했으나 갑작스러워서 그런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제자가 엉뚱하게 두 가지를 대답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아니, 그것이 하나였던가? A가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얼굴을 짓더니 말투를 바꿔서 말했다.
“묻겠노라. 나의 길을 꿰뚫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뭐야, 그 말투? 날 아랫사람으로 취급하는 거 같아서 짜증난다. 그래, 하나라고? 모르겠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살짝 뾰족해진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A는 혀를 살짝 내밀더니 어깨를 으쓱한 뒤에 말을 이었다.
“뭐, 그렇겠네. 나도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알겠어? 난 공자님과는 다르게 그게 뭔지 도통 감이 안 잡혀. 그래서 내 글을 읽는 거야. 요즘 들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림자 쪽으로 오히려 나아가고 있었건 것은 아닐까 하고.”
“헤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안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수렁처럼?”
 바로 생각난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에 발목 잡히는 일도 있는데 벗어나지 못한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A는 내 대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랑 달라. 오히려 친구를 적으로 잘못 알고 미워했다는 이야기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여태까지 그것에 다가서고 있었어.”
“아니,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좀 내가 알아듣게 해봐.”
“나의 그림자를 거쳐서 마주해야 할 것, 내 안에 있었던 것, 나는 뭘까 하는 질문, 거기에 대한 대답, 소설가인 내가 여태까지 써온 수많은 문장, 그것으로 쌓아낸 이 탑, 그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
“알아먹게 말하라니까,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내가 비아냥거렸으나 A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A가 아주 먼 곳에 서 있는 사람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A의 그 달관한 듯한 표정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A가 말했다.
“나는 아팠어. 많이 아팠어. 아니지. 그것만이 아니야. 아파. 아직도 아파. 그저 견딜 뿐. 죽음을 생각했어. 끝을 생각했어. 그리고 나의 글을 생각했어. 근거는 없지만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어. 내가 죽을 때 나를 위해 가져갈 수 있는 글은 여기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야. 그러기에 소설은 너무 길어. 그러니까 나는 내 마지막 글을 써야 해. 그건 소설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까 네가 말한 신작 준비와는 달라. 그래도 글을 쓸 준비를 한다는 점에선 비슷해.”
 멋대로 죽음을 입에 담지 말라거나 수술이 잘 될 거라거나 하는 말이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A가 입으로 빚어낸 이야기에 홀려 있었다. A는 나의 눈을 마주보며 웃었다. 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마지막 글은 어떤 건데?”
 A가 침대 옆에 쌓인 자신의 탑을 바라보더니 눈을 빛내며 단언했다.
“한 문장이야.”
“한 문장이라고? 그게 무슨 뜻?”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A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한 문장. 소설은 너무 길어서 안 돼. 하지만 어설픈 글을 가져가는 건 싫어.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모든 것을 담는 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야.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 여태껏 내가 써온 글들은 마지막 순간에 그 한 문장을 빚어내기 위한 연습이었다고 말이야. 나는 지금까지 온갖 이야기를 펼쳐냈어. 많은 문장을 썼어. 내 모든 글이 책에 실리지는 않았으니까 그건 적어도 여기 있는 이 책보다는 훨씬 많아. 하지만 끝이 다가와.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할 때가 온 거야. 그래서 나는 내 책을 읽고 있었어. 가장 알맞은 낱말을 가장 알맞게 엮어낼 거야.”
“……소설을 쓰다가 질리니까 이제 시인이 되려고?”
 내가 가까스로 대꾸했다. 말을 골라내고 압축한다니 시가 떠올랐기에 그것을 입 밖에 꺼냈다. 이미 진지하게 삶을 정리하려고 하는 A에게 나는 철저히 압도되었다. A가 쿡 웃은 뒤에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볼 여지가 있기는 하겠네. 하지만 그건 시와도 다르다고 생각해. 시도 소설도 넘어선 곳에 있어. 내가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건 그거야.”
“그리고 그 한 문장은 네가 여태껏 걸어온 길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될 거고?”
 문득 그것은 표어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바로 그거야. 그 문장이야말로 나의 길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될 거야. 그거야말로 내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을 만한 글이야. 그런 걸 쓰는 게 내 현재의 목표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어. 하지만 왜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그 생각들이 이어지는지 못 쫓아가겠다는 느낌이라고 하면 되겠네. 그래도 이건 꼭 물어봐야겠어. 너는 지금까지 쓴 글을 마주하고 그것을 한 문장으로 꿰뚫어야 한다고 생각한댔지. 그건 너만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도 그런 걸까? 어쩌면 나도, 그럴까?”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A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에게도 A처럼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모르겠네. 나는 그저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야. 어쩌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아니지, 더 넓혀볼까?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일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나만 이러는지도 모르고. 내가 아는 건 그저 나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뿐이야.”
“그래? 그러면 나는 아직은 모르는 채로 있어야겠네. 그런데 그, 한 문장을 이뤄냈다고 치자. 그러면 그걸 누구한테 보여줄 건데?”
 내가 물었다. A는 내 그런 질문을 듣고 생각지도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응? 남한테 그걸 왜 보여줘? 당연히 마음속에만 품고 갈 생각인데? 아,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걸 말해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겠네. 그래, 그 한 문장이 떠오르면 반드시 너한테도 보여줄게. 다음 주에 수술을 할 거야. 안 받아도 되는데 부모님이 희망을 가지라고 그러니까 받게 됐어. 그 전까지는 반드시, 꼭 그 한 문장을 찾아낼 거야.”
 A가 멋대로 이렇게 말했을 때 면회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남은 것은 그저 A가 멋대로 꺼낸 약속뿐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A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내가 바깥에서 기다릴 때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나는 A가 남긴 한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읽어 왔던 A의 글들을 생각했다. 아직도 나는 그 문장이 A가 그때까지 쓴 글들을 제대로 꿰뚫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A가 남긴 마지막 글이라면 애독자인 내가 그것을 읽는 것이야말로 A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A에게 작별인사를 보냈다.
 잘 가.
 기도할 때 신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았듯이 이번에도 A의 대답을 상상하지 않았다.

03.

 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 꽃다발은 A에게 바치려고 가져왔다. 오는 길에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내 복잡한 마음을 더욱 어지럽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이 있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비장하게 굴더니 살아남으면 어떤 기분이야?”
 가능성이 낮다던 수술은 다행히도 무사히 끝났다. A의 몸 상태는 나아지고 있으며 한 달 안에는 퇴원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일반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내 눈물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결과만 좋았다 뿐이지 위험했던 것은 틀림없다.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틀림없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능성이 작은 일이 일어나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이번에도 그랬던 것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살아남은 A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인간적으로 그건 건드리지 말자. 나도 엄청 쪽팔린단 말이야.”
“어쨌든 굉장히 부끄럽다는 거지? 잘 알겠어. 그래도,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대꾸했다. 그것만큼은 내 진심이었다. A가 죽을 줄 알았다. 그래서 살아남았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다. 물론 거기에 허탈함이 뒤섞기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을 가지고 나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나처럼 주저앉는 것은 외려 점잖은 쪽에 들어갔다. 기쁨의 눈물로 그곳에서는 난리가 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A가 이번에는 이쪽으로 돌아왔다.
 A가 살았다는 것을 알고 나자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이 바뀌었다. 수술 때에는 그렇게나 차가워 보이던 벽을 봐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닫힌 문을 보고 벽이라는 느낌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아마 너무 예민했던 것뿐이리라. 내가 그랬는데 본인인 A야 오죽했을까?
 A가 고개를 들고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리고 내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서 옆에 있는 꽃병에 꽂았다. 다른 한 쪽에는 지난번처럼 책이 쌓여 있었다. 이번에는 A의 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책도 섞여 있는 듯했다.
“나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죽을 거 같은 소리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건 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지. 그 때문에 이제 와서 보면 참 부끄러운 소리를 많이 했어.”
 그러고 보니 A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아까 집에서 그것을 챙길 때는 어디에 따로 넣어서 줄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는 내 나름의 배려였다. A는 그것을 알아본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어디 버렸으면 좋았을걸.”
“너 같으면 그럴 수 있겠냐고 묻고 싶은데. 어쨌든 이건 네가 고민하고 고민해서 쓴 글이잖아.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을 꿰뚫는 한 문장이기도 하지.”
“아까 말했지만 인간적으로 그 이야기는 건드리지 말자. 하긴, 애초에 내가 꺼낸 일이니까 어쩔 수 없나……. 어디, 줘봐. 그때도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까 글씨 정말 엉망이다. 뭐, 아파서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글씨가 번졌네?”
 A가 나를 보며 슬며시 물었다. 말할 것도 없이 글씨가 번진 것은 내 눈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비장하게 군 A가 살아남은 것은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나는 거기에 맞추듯이 울었던 일이 부끄러워서 둘러댔다.
“성공률이 낮은 수술이 이뤄지는데 밖에서 기다리는 것도 긴장감이 굉장하더라.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고. 그러다 보니 글씨가 번지기도 했겠지.”
“……뭐, 그런 걸로 치고 넘어가고. 어쨌든 이게 그 글? 그때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영 아니네.”
“왜? 더 나아가야 할 곳이 있었나 보지? 그렇게나 생각하고 생각해서 꺼낸 문장으로도 모자라?”
 내가 받아쳤다. 살짝 비꼬는 말투가 되었다. 그러나 A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수술하기 전보다는 덜 희게 된 A의 손이 침대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일부러 다리를 괴롭힐 까닭이 없었기에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것을 넌지시 물었다.
“아직도 모든 글을 꿰뚫는 단 하나의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헷갈리게 되었달까? 그때는 꼭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또 달라. 적어도 이게 내 마지막 글이 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해. 만약 또 그런 일을 하게 되더라도 아직 쓰지 않았지만 그때에는 이루어져 있을 글까지 포함해서 문장을 지어내야 하겠지. 그러니까 이건 이제 아니야. 나는 살아 있으니까 이 한 문장도 바뀌어갈지도 몰라. 시간과 그에 따른 경험이 있으면 더 좋은 문장을 생각해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 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쓴 글들을 소중하게 품고 있는 게 좋겠지. 이제 이건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 종이를 찢으려는 A에게 내가 말했다.
“그것도 네가 소중하게 품고 있어야 할 글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데?”
A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더니 옆쪽을 뒤져서 펜을 하나 들었다. 그리고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 안에 있는 책갈피를 꺼내더니 펜으로 거기에 글씨를 썼다. 그 종이와는 다르게 단정한 글씨였다. 종이에 실린 문장을 옮겼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말대로 이것도 품고 가야겠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말이야. 있지,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 문장이 내 생애 최고의 문장이었어. 하지만 곧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마취되어서 의식이 없을 때 말이야. 꿈을 꿨거든.”
“어떤 꿈이었는데?”
“바다가 있었어. 모든 생각들이 물결치고 있는 바다. 그 안에서 나는 뭔가를 봤어.”
“뭐가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였어?”
“모르겠어. 아, 약 올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믿어줘. 봤는데 기억이 안 나. 하지만 거기에는 모든 것이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쨌든 그걸 보니까 이 문장은 아니었다고 생각되더라.”
“끝까지 아리송한 소리인가……. 뭐, 정말 그런 게 있었다면 잊어버려서 엄청나게 아쉽겠는데?”
 내 말에 A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은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지금 A의 앞에 있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A가 말했다.
“아니. 전혀 안 아쉬워. 만약에 그걸 기억했더라면 다시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을 거 같아.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 말은 지금은 글을 쓰고 싶다는 소리?”
“그래, 글을 쓰고 싶어. 정말 미칠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 한 문장을 위해 글을 쓴다거나 하는 건 아무래도 좋아. 그냥 글을 쓰고 싶어. 휘몰아치는 글도 좋아. 부드럽게 감싸 안는 글도 좋아. 날카롭게 잘라버리는 글도 좋아. 날 웃게 하는 글도 좋아. 날 즐겁게 하는 글도 좋아. 널 슬프게 하는 글도 좋아. 널 화나게 하는 글도 좋아.”
 A의 열띤 말이 길어졌다.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끼어들었다.
“잠깐만. 왠지 안 좋은 쪽을 나한테 떠넘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러나 A는 전혀 듣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작을 준비할 거야. 내 책을 읽고, 남의 책을 읽을 거야. 뉴스를 볼 거야. 신문을 읽을 거야.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거야. 그 모든 것을 녹여내서 글을 쓸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며칠 뒤에 너도 새 책을 낸다면서? 다음에 올 때 하나 가져와. 읽고 참고할게.”
 나는 그 엄청난 열정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말했다.
“병 하나가 나았다고 하더니 이제는 또 다른 해괴한 병이 도졌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A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글을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그런 나를 보더니 A는 어떤 말을 내뱉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마 A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리라. A의 말은 겉으로는 나에게 뱉은 말인 듯했으나 그뿐이 아니었다. A는 그 자리의 나를 넘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또 넘었다. 마침내 이 글을 읽을 모든 사람들까지 마주보았다. 나는 언제든 다시 그 물음에 마주하고 싶다. 그래서 그 말을 이 글의 마지막으로 삼는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과거의 말이 아니라 현재에도 이어지는 것이 된다. A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는 너는 어때?”

장철호(국어국문학 10)  press@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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