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손마다 불이 일었다. 진심 어린 분노는 저마다의 손에 촛불을 거머쥔 채 광장에 모여들었다. ‘우리’가 아니었음을 자인한 그들에게, 백만의 촛불은 스스로를 대표해 나와 목소릴 높였다. 1,000,000. 단순히 싸잡기에는 저마다의 말이 있었다. 엄장했고 또 아름다웠던 이 서슬 퍼런 화는, 그럼에도 서글펐다.
참 아픈 날이었다. 권력에 맞선 집단 속에서 낯을 드러낸 위계 탓이다. 대통령을 향한 날선 말 한편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자리했다. ‘정신박약자’나 ‘발달장애’가 그랬고, ‘저잣거리 아녀자’도 그러했다. 광화문에선 ‘잡년’ 따위의 추악한 말도 울려 퍼졌다. 언론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기사를 마구잡이로 양산해냈다. 이 쏟아지는 ‘망언’을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다. 특정 집단에의 비유에는 그 대상과의 유사성이 필요하다. 연일 쏟아지는 의혹을 보고 있노라면, 대통령은 노회찬의 말마따나 ‘확신범’임이 명백하다. 헌데 그의 성별이나 정신 상태를 잣대로 들이대면, 곧 ‘여성’과 ‘장애’ 집단은 ‘잠재적 범죄자’가 될 터이다. 결국 소위 전문가라 일컬어지는 집단이 내뱉은 이 어휘들은, 특정 집단에 대한 무지한 선입견에서 비롯해 비하와 혐오로 점철된다. 혹자는 ‘웃자고 한 소리’라 떠들지만, 웃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집단이라는 폭력은, 다른 지점에선 억압이다. 권력에 맞선 집단화는 강력한 힘일 수 있지만, 권력이 명한 집단화는 통제와 다름없다. “촛불은 촛불일 뿐, 결국 바람이 불면 다 꺼지게 돼있다”는 한 치의 발언에, ‘집회에 모인 백만의 목소리’는 ‘백만이 모인 하나의 집회’ 따위로 집약됐다. 수사를 받겠다던 대통령은 불과 10일 만에 입장을 틀었고, 공석이던 차관 인사를 강행했다. ‘로봇’이나 ‘샤머니즘’이라는 외신의 조롱에도, 꿋꿋이 외교 일정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쯤 되면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무거운 마음으로 들었다”는 수사는 장난질에 가깝다. “잠이 보약”이라는 한마디는, 국민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백만 혹은 95%의 주체는, 이렇듯 손쉽게 하나의 객체로 전락해버린다.
‘집단’을 경계할 일이다. 차별과 혐오는 ‘개인’이 아닌 ‘집단’을 보면서 행하는 폭력이다. 객체화된 집단은 무시와 억압의 수단이다. ‘동성애=에이즈’라는 수식이나 ‘304명이 죽은 여객선 사고’라는 집단화도 여기서 기인한다. 개나 돼지 따위로 천박하게 묶여버리는 국민이라는 집단이, 무감한 폭력에 휘둘리는 ‘소수’라는 집단이, 촛불을 거머쥐고 광장으로 나온 집단이, 수시로 말 바꾸며 권력의 개 노릇하는 경찰이라는 집단이, ‘여성의 사생활’로 싸잡혀 불쾌한 여성이라는 집단이, ‘영하 10도’에 비유되는 ‘밖’의 집단이, 그래서 아프다. 어쩌면 이 ‘집단의 법칙’을 내면화했을지도 모를 내 초상마저 아프다. 언제건 내 ‘집단’이 억압받을 수 있음을, 아울러 내 ‘집단’에 폭력이 내재돼있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서슬 퍼런 화가 식지 않는 한 광장은 또 다시 밝혀진다. 모여든 촛불은 만연한 혐오로 인해 스스로 분열할지도, 혹은 그치의 말마따나 바람에 꺼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304명이 각자 목숨을 잃은 304건의 사건’을 지긋하게 곱씹어야 함만이 분명하다. 빛은 결국, 저마다의 촛불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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