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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배설
  • 신지인 편집국장
  • 승인 2016.11.21 06:44
  • 호수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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찝찝하다. 마지막으로 쓰는 한림원 제목이 배설이라니, 점잖지 않은 건 확실하다. 지난 2년 반, 취재원들은 나에게 저마다의 응어리를 풀어냈다. 이를 집어 삼키고, 나름의 소화 과정을 거쳐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소화가 진행될 땐 복잡한 자료와 감정들이 속에서 마구 뒤섞이고 요동쳤다. 마침내 기사를 탈고하면 배설하고 난 뒤와 같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배설과 같은 사생활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사생활이 여성과 결합되면 다른 뉘앙스가 풍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 달라’. 지난 15일 박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유영하 씨가 했던 발언이다. 인간으로서의 사생활도 아니고,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통령의 성별이 단지 그를 변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되고 말았다. 단지 ‘여성으로서’라는 수식이 붙었을 뿐인데 요점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그동안 취재를 하면서, 자신의 성별을 핑계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여성들은 인생에서 스스로의 성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유영하 변호사의 말을 듣자, 작년에 취재했던 전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김소연 씨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긴커녕, 모멸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한여름 땡볕 아래 농성을 하느라 땀에 절은 여성 노조원들은 용역 직원들과 동료 노동자에게 ‘썩은 내가 난다’, ‘더러운 년들’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취재원 중에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팔아야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완월동의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붉은 장막 사이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그녀들. 대개 경제적 빈곤과 인권침해에 허덕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안전망이 붕괴된 상황에서 이 여성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성매매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 정권은 그들을 외면했다. 성매매 가담자와 업주가 아닌, 오히려 여성들을 처벌하는 법체계에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로써 다시 한 번 그녀들에게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리고 자신의 인권보호도 쉽게 요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지금도 그녀들의 여성성은 신・변종 성매매가 늘어나는 사회 속에 흩어지고, 잊히고 있다.
이들을 만나 감정의 배설을 수차례 겪은 나로서는, 유영하 변호인의 핑계를 참을 수가 없다. 세상엔 ‘사생활’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여성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혹독한 현실을 외면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그런데 헌법까지 초월하며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대통령은, 여성이라는 프레임 뒤로 숨어버렸다. 여성성을 방패삼아 잘못을 희석시키려 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마땅히 분노해야 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정권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여성으로서 같은 부조리함을 느낄 지도 모른다.
마지막 배설을 앞두고, 속에서는 아까 먹은 아메리카노와 현 정권의 여성 관념과 김치국밥, 박근혜 대통령이 뒤섞이고 있다. 제대로 된 음식물이 아니다보니, 소화를 무사히 해낼지 모르겠다. 자칫 잘못하면 체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상식적인 글감으로 글을 쓰고 싶다. 더부룩하다. 

   
신지인 편집국장
amigo@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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