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시선+
짧지만 밝게 타올랐던 학생운동을 돌아보다
  • 김민관 대학부장
  • 승인 2016.11.21 04:28
  • 호수 1534
  • 댓글 0
   
 

총학생회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총학생회의 정치활동 참여에 대한 논쟁도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정치활동에 대한 학생들의 피로감과 거부감이 적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다. 한때 대학생들이 사회 변혁의 아이콘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들은 4.19 혁명에 힘을 보탰고 부마민주항쟁을 이끌어냈다. 1980년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고 실제로 세상을 바꿔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많이 다르다. 그 변화는 어디서 기인했나

 

서울역 회군과 피로 물든 광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짧게나마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12.12 쿠데타로 군대를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려 했고 이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저항이 일어난다. 1980년 5월 13일 학생들이 도로로 나서며 시작된 시위는 15일 절정에 이르렀고, 서울역 광장에는 32개 대학에서 모인 10만 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밤이 되면 군대가 유혈진압을 벌일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고, 학생운동 지도부는 철야농성 대신 해산을 택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서울역 회군 결정은 신군부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5월 17일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각 대학을 급습해 학생운동 지도부를 체포했다. 당시 서울대학교(이하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 작가는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에서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며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한편 전국에서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전남대학교(이하 전남대)였다. 전남대 학생들은 서울역 회군 이후에도 시위를 이어나갔고 5월 18일에도 전남대 정문 앞에 결집했다. 그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의 막이 올랐다.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광주의 비극을 안고 성장한 학생운동

광주의 비극은 학생운동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언론통제 속 몇 장의 사진으로 전해진 광주의 진실은 학생들에게 부채감과 함께 독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줬다. 동시에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를 줬다. 그동안 미국은 지미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 기조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지지자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미국의 방조, 혹은 묵인 아래 광주의 참극이 벌어졌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반미정서가 크게 대두됐다.
동시에 운동의 방향도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전까지의 학생운동은 ‘독재타도’와 ‘민주쟁취’에 매진했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단순한 자유민주주의로 해결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금기시되던 사회주의가 학습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조악한 번역의 <자본론>, <공산당 선언> 따위가 비밀리에 유통됐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 교수는 <경향신문> 기고에서 ‘어떤 사회체제를 열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개혁과 혁명을 포함한 변혁 담론을 활성화시켰다’며 ‘학생운동세력과 진보적 연구자 그룹들은 그동안 학계에서 금기시돼왔던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개화시킴으로써 군부독재 아래서 억눌려온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발시켰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논쟁은 필연적이었다. 시작은 1985년 10월 <창작과 비평> 제57호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이었다. 박현채(조선대 경제학) 전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한국을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판단했다. 반면 이대근(성균관대 경제학) 명예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붙여>를 통해 한국은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했다. ‘사회구성체 논쟁(이하 사구체 논쟁)’은 그렇게 촉발됐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크게 3단계에 걸쳐 혁명의 성격과 주력대상, 전술적 방향 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학생운동의 주류를 장악하고대중노선의 길을 걷다

사구체 논쟁이 2단계로 접어든 1986년, 학생운동 분파는 크게 민족해방파(이하 NL, National Liberty)와 제헌의회파(이하 CA, Constitution Assembly)로 정리됐다. NL 계열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자민투)를, CA 계열은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민투)를 이끌었다. 한편 이 시기 대학가에는 <강철서신>이라는 문건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김영환 씨가 작성한 이 문건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활동가의 품성과 있는 자리에서의 투쟁을 강조한 <강철서신>은 무서운 감성적 호소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학생운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NL 운동이 이와 결합하여 민족해방과 민족공동체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조류, NL 주체사상파가 출현했다.
86년은 학생운동의 혼란기였다. 85년 말부터 써클 해체를 통해 세력을 불려나가던 NL은 서울대에서 최초로 자민투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민민투 일변도였던 타 대학에서도 조직사업을 펼쳐나갔다. 그 과정에서 잦은 충돌이 빚어졌다.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민민투 성향의 총학생회가 자민투 유인물을 모아 불살라버렸고, 고려대학교에서는 자민투가 민민투 집회 진행을 방해하면서 학생들끼리 각목을 던지며 싸우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래서야 어떻게 독재정권에 맞서겠냐는 환멸과 함께 자민투와 민민투의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는 26개 대학 2,000여 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자민투와 민민투의 다툼을 끝내고 공동의 실천방향을 정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애학투련) 결성식을 위해서였다. 당시 애학투련 의장이었던 김신 씨는 <한겨레>에서 주관한 좌담회에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으로 민민투도 반미투쟁에 들어갔다’며 ‘(두 단체의)차이가 사라졌고 합치자는 말이 나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애학투련 결성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번 기회에 학생운동을 아예 뿌리 뽑겠다고 마음먹은 경찰이 건국대학교를 포위한 것이다. 돌아갈 길이 막힌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3박4일 동안 점거농성을 벌였다. 이른바 ‘건대항쟁’이었다. 이 때 무려 1,500여 명이 연행됐으며 약 1,300명이 구속됐다.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던 NL은 건대항쟁 이후 대중노선으로의 완전한 전환을 꾀했다. 투쟁 구호부터 독재 타도와 직선제 쟁취로 단순화했다. 6월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은 대중과 훌륭하게 결합했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성과도 얻어냈다. 이를 바탕으로 그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이 출범했다. 한편 대중과 괴리된 CA 계열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일부는 NL 비(非)주체사상파를 이뤘고 나머지는 민중민주파(이하 PD, People's Democracy)로 이어졌다.

 

너무나 짧았던 전성기 너무나 빨랐던 쇠퇴

전대협의 출현은 학생운동에 있어 의미있는 변화를 불러왔다. 1989년 제3기 전대협 의장에는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선출됐다. 한양대학교에 전대협 사무실도 설치됐다. 이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들이 학생운동을 주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90년에는 전대협 의장 자리가 전남대에 돌아가면서 최초로 전국 학생운동의 주도권이 지역에 넘어가는 일도 생겼다. ‘구국의 강철대오’를 표방한 전대협은 통일운동과 반정부투쟁의 선두에 서며 1990년 <시사저널>의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여론조사에서 여당과 야당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91년 4월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강경대 열사가 사망하면서 이른바 분신정국이 시작됐다.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무려 11명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당황한 정부는 역공을 준비했고,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과 김지하 시인이 선두에 섰다. 특히 박홍 총장은 잇따른 분신 뒤에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고 때맞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터졌다.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친구 강기훈 씨가 대필해줬다는 것이다. 2015년 대법원이 재심에서 강기훈 씨에게 무죄를 선고함에 따라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계속되는 분신에 피로감을 느끼던 1991년의 국민들은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결국 1993년 전대협은 해체를 선언했다. 대신 이를 계승하여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이 출범했다. 한총련은 초기 쌀 수입 반대 투쟁을 이끌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뤄내는 등 소기의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조문 논쟁을 거치며 그나마 있던 한총련 내 PD가 힘을 잃었고 NL은 더 큰 힘을 얻게 됐다. 슬로건도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에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변경됐다. 사회적 환경 변화와는 반대로 도리어 이념지향성이 강화된 것이다. 1996년 연세대학교(이하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병언 씨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1986년 이후 NL이 대중적으로 성공했던 건 대중노선 때문이었다’며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엔 대중이 사라지고 교조적인 이념만 남았다’고 지적했다.
이 괴리는 1996년 ‘연세대 사태’로 폭발했다. 한총련은 광복절을 맞아 연세대에서 8.15 범민족대회를 진행했고, 경찰은 연세대를 포위했다. 퇴로가 막힌 학생들은 점거농성에 들어갔고 경찰은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총 5,800명이 연행되고 462명이 구속됐다. 마치 10년 전 건대항쟁의 복사판 같은 모습이었으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10년 전 학생들은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지만, 10년 후의 학생들은 개량주의적 민주정권에 맞서고 있었다. 여론은 학생운동의 폭력성과 교조성에 치를 떨었다. 한총련은 이를 기점으로 이적단체로 규정됐다. 학생운동의 동력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다.
세상은 변했고 운동은 무너졌다

연세대 사태 이후 PD는 한총련을 뛰쳐나와 별도의 단체를 결성했다. 조직의 분열과 이적단체 낙인은 한총련의 쇠퇴를 부채질했다. 한총련은 2000년대 들어 사실상 소멸했다. 새롭게 구성된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이하 한대련) 역시 쇠락했다. 올해 우리 학교마저 한대련에서 탈퇴하면서 이제 한대련에 가입된 대학은 단 4개 밖에 남지 않았다. PD 계열 학생조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한때 상시적으로 1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던 전국구 학생운동조직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학생운동의 몰락 원인은 우선 절차적 민주화의 달성에서 찾을 수 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한국은 형식적으로 민주주의 체계를 갖췄다. 학생운동과 대중이 결합했던 민주주의 쟁취라는 연결고리는 힘을 잃었다. 크고 명확했던 적은 사라졌고 전선은 모호해졌다. 동시에 학생운동의 극단성과 폭력성이 부각됐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다는 사회적 피로감도 증가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 북한 체제의 위기도 쇠퇴를 가속화했다. 마르크스에서 레닌,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정통 사회주의 이론을 지침으로 삼은 PD에게 소련의 붕괴는 곧 이론의 붕괴를 의미했다. 북한 주체사상을 이론으로 삼은 NL의 상황도 비슷했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추구했던 목표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을 시작했다. 일부는 극우파로의 전향을 선택했다. 그나마 남은 이들은 이념지향성을 강화했다. 세력은 약화됐고 괴리는 커졌다. 조국(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 무렵엔 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개량의 시대가 왔다는 걸 인정하고 진지한 모색을 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학생들의 지위와 사회상황이 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진학자 수의 증가와 저성장 국면으로 인해 대학생들은 더 이상 사회의 엘리트가 아니게 됐다. 과거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던지며 민중을 위해 투신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던질 기득권이 남아있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도리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제는 민족과 사회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싸워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기존 학생운동의 기반은 하나 둘 사라졌다. 운동의 지속가능성에도 먹구름이 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학생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큰 부분이다. 수많은 이들이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져 싸웠고 그 결실도 얻어냈다. 그러나 짧은 전성기를 구가했던 학생운동은 곧이어 쇠퇴했다. 그리고 작금의 대학에는 정치혐오와 무관심이 가득하다. 학생들의 투쟁은 정말 여기서 끝인 것일까. 앞으로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이후 합법화 투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김민관 대학부장  left0412@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민관 대학부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