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몇몇 소설가분들과 만나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중 한 분이 한숨을 푹 쉬면서 요즘은 도대체 소설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지금 한국 사회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으니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 앉아 있던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필자는 그 대답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서사는 인간의 말과 행동을 개연성 있게 모방(mimesis)해야 한다는 원칙이 성립되었다. 개연성 있는 모방이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닐지라도 마치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그럴듯하게 모방한다는 뜻이다. 비록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이러한 원칙이 의심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작품의 가치 판단 과정에서 개연성 없는 작품이 개연성이 충분한 작품에 비해 더 가치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사태’의 경우, 아무런 개연성도, 원칙도, 가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최고 권력자와 그 측근들이 국가를 사유화하고 밑도 끝도 없이 추악한 짓거리를 일삼은 서사 전개 과정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만약 어떤 작가가 이러한 내용을 소설로 쓴다면, 과연 그 작품이 개연성 있는 모방으로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가치를 줄 수 있을까? 십중팔구, 아니 십 중 십은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하면서 작품 같지 않은 작품을 내팽개쳐버릴 것이다. 그렇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소설 같은 게 아니라 소설보다 훨씬 못한, 심지어 막장드라마의 서사 전개보다 못한 이야기들로 빼곡한 것이다. 필자가 ‘소설 같다’는 한 소설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이유다.
흔히 막장 드라마의 문제점으로 서사 전개의 비현실성을 거론하곤 한다. 캐릭터의 느닷없는 변화, 자극적인 내용과 설정, 복수와 인정투쟁으로 점철된 단순성, 막말과 고함만으로 매일 아침과 저녁 텔레비전 스피커를 두들기는 인물들의 성대 차력용 대사 등등.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보는 이유는 매회마다 낯익지만 충격적인 이야기가 계속 펼쳐지고 시청자들 또한 이를 은근히 기대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실도 막장이지만, 막장 드라마는 그보다 더 막장인 인물 · 사건 · 배경 · 이야기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막장(현실)을 막장(허구)으로 덮을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나마 안전하지 않느냐며 값싼 위로를 건넨다. 막장 드라마는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계속 보게 되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우리를 위로하기에 꾸준히 애청하게 되는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정신분석학 식으로 말하자면, 실재(the real)가 풀쑥, 우리 사회 안으로 자신의 머리를 들이민 것이다. 막장 드라마조차 덮을 수 없을 만큼, 허구로 대체가 불가능할 만큼, 위로가 불가능할 만큼, 안전하다고 믿고 싶었던 우리들의 허구 같은 사회가 실은, 막장보다 더 막장임을 여지없이 폭로해버렸다. 이러한 감각적 실정성으로부터 우리를 도피하게 해 주는 어떠한 경로도 현재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으로 몰려가서 촛불을 들고 시국 선언을 하며 갖가지 창의적인 풍자와 패러디가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도피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도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막장 드라마의 결말은 항상 권선징악으로 끝난다. 막장을 막장으로 만든 저 막강한 권력의 끝은 무엇이 될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사태의 본질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우리는 권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안전지대로 투항하여 ‘자발적으로’ 낄낄거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막장이 우리를 위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막장 같은 현실에 신음하면서만 살지 않기 위해서 한국의 명예혁명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한다.

손남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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