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으로 얼룩진 ‘박근혜 게이트’에서 느끼는 환멸과 피로감이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미국 대선의 결과 앞에서는 충격을 넘어 공포가 된다.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시민의 저항은 점점 거세지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당선 후 곧바로 반대 시위가 확산 중이다. 향후의 한국 정국도 유사 파시즘과 자국 이기주의가 거세지는 전 지구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혹자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여성’ 정치인이 몰락했다고 말하고, 심지어 박근혜 게이트가 힐러리가 패배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한다. 예컨대 최순실이라는 민간인이 국정연설문을 수정했던 것과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은 ‘공사 구분을 못 하는 여자들’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서로 강화할 만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중요한 정치 세력이 되는 길을 천 년쯤 후퇴시켜버린 느낌이다. 오랜 정치 활동을 통해 경륜을 두루 갖춘 힐러리가 성희롱과 노골적인 인종 차별 발언을 해대는 아웃사이더 트럼프에게 패배했으니 ‘유리천장’이 두꺼운 건 분명하다.
그런데 박근혜와 힐러리는 진정으로 ‘여성적인’ 정치세력인가? 대통령 앞에 붙는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의미 있으려면 그동안의 성차별, 위계제와 군국주의, 빈부 격차를 해소할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기성 정치 구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그것에 편승해 스스로의 여성성을 지우고 낡은 정치의 구습을 반복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 격렬한 저항운동을 벌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처럼 새롭게 ‘법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다. 그런데 ‘비운의 왕녀’ 이미지에 편승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옛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에 속수무책이었고,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위안부 문제 졸속 협상, 갑작스러운 개성 공단 폐쇄와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마치 유신독재 시대로 되돌려놓았다. 지금에 와서 보니 박근혜 대통령이 낡은 이념에조차 기대지 않고 그저 ‘트라우마’에 갇혀 있었다니 허탈할 뿐이다.
많은 언론에서 이번 미 대선의 결과를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힐러리의 패배로 분석하고 있다. 기성 정치에 강한 불만과 회의를 느끼는 유권자들에게 힐러리가 어떤 변화와 희망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패인이었다. 예를 들어 힐러리는 월가의 초청으로 고액 강연료를 받고 대중 앞에서는 금융 규제를 주장했다. 자선 단체라는 클린턴 재단은 거액의 대가성 기부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힐러리 캠프가 샌더스 후보가 일으킨 돌풍을 겸허하게 인식했다면 민주당 좌파의 비판과 노동자 계층의 요구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했다.
박근혜 게이트 때문에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여성 혐오가 더 번지지 않기를 바란다. 문제의 핵심은 유영하 변호인이 뜬금없이 호소하는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책임을 방기하고 불법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권이 우리보다 신장되었다는 미국에서도 힐러리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는데 어째서 박근혜는 그렇게 쉽게 대통령이 되었을까? 증세 없는 복지를 하겠다는 박근혜의 허황된 거짓말에 속은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대가를 미국 시민들도 곧 뼈아프게 치르게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김정화(사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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