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학적인 이야기들

  오래 전부터 우리들은 ‘유전’ 이라는 의미의 이야기를 자주 생활 속에서 사용하여 왔다. 예를 들어 ‘누구는 얼굴 모습이 아버지를 꼭 빼 닮았다’ 라던지 ‘누구는 어머니의 꼼꼼한 성격을 그대로 닮아서’ 또, ‘어떤 질병들은 가족력을 잘 살펴야 한다’ 는 등등. 이러한 이야기들은 과학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기본적으로 유전이라는 사실에 근거했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전이란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유전적 실체, 유전정보, 즉 DNA를 중심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1800년대 멘델이 완성한 유전법칙 이후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발전해온 근대 유전학(genetics)에서 주장하는, 어버이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진 유전정보는 DNA라는 언어로 쓰여 있으며 DNA를 이루는 염기서열의 변화와 그들의 재조합에 의해 우리에게 관찰되는 개체의 모습이나 생명현상의 특징인 표현형 또는 형질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변화가 발생한다는, 현대 생명과학의 근간을 이루어온 개념이다.

 
새로운 유전학
 
  이러한 고전적인 유전학에 큰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데 이는 DNA 염기서열에 변화가 전혀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유전자 기능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현상이 있다는 이론이고 연구결과로 속속 증명이 되고 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유전현상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유전자 발현이나 기능의 변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떻게 자손에게 전해지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가 199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연구분야가 바로 ‘후성학(epigenetics)’이다. 어떤 면에서 후성학은 유전정보가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멘델의 유전학과, 개체가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후대에 전해지지만 사용되지 않는 기관은 퇴화된다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가설의 양립할 수 없어 보였던 두 이론을 통합해서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전물질의 구성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수는 모두 수십조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들 모든 세포는 핵을 갖고 있고 그 안에 염색체라는 모습으로 유전정보 즉 DNA가 저장 되어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DNA 이중나선 가닥이 히스톤 단백질들을 규칙적으로 둘러싸고 있고 또한 그 주변의 다양한 단백질 등의 물질들과 결합을 하면서 고도의 포장 기술로 저장이 되어 있다. 이를 크로마틴(chro-matin) 이라고 하는데 그 구성원인 DNA와 히스톤 단백질은 주변의 단백질들에 의해 △메칠화 △아세틸화 △인산화 등등의 생화학적 변화를 받을 수 있고 이런 가역적인 변화들은 크로마틴 구조에 다양한 변화를 유발하고 결국 유전자들의 발현 조절이 이루어지게 된다. 
 
  유전자 발현조절의 중요성은 가령,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세포의 유전정보는 100%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지만 우리 몸의 다양한 장기와 조직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의 모습과 역할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분화가 끝난 신경세포와 혈액세포는 모양과 기능이 천지 차이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동일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던 줄기세포들이 어떻게 이렇게 다르고 다양한 세포들로 분화를 하게 되는 것일까? 그 가능성은 바로 분화 되고자 하는 세포에 필요한 유전자들만 선별해서 발현을 적당한 시기에 필요한 정도로 발현시키고 나머지 유전자들은 발현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인데 이 메커니즘이 바로 ‘후성학적 유전자 발현 조절’인 것이다.
 
후성학의 과학적 증거들
 
  19세기 스웨덴 북쪽 끝의 Norrbotten 이라는 시골마을은 흉작에 따른 극단적인 기근과 또 풍년에 의한 폭식이 몇 개월씩 반복되곤 했는데 그에 관한 기록들이 다 보존되어 있다.  1980년대 중반 스웨덴 Karolinska 연구소의 Bygren 박사 등은 기근과 폭식을 경험한 사람들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후성학적 지표들을 추적하여 건강기록과 비교를 하였다. 이들은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는데 기근 후 폭식을 경험한 이들은 그들의 자손뿐 아니고 손주들의 수명까지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결과에 의하면 수개월간의 폭식을 경험한 사람들의 자손은 그 당시 평균 6년 일찍 사망하였는데 이를 현재의 치수로 환산하면 30년에 가까운 매우 긴 시간을 의미하는 수치라고 한다. 연구자들은 추후 연구로 이들 사이에 DNA 메칠화 패턴 등과 같은 유의미한 후성학 지표들의 변화도 대를 이어 물려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다른 예로 2006년 영국과 스웨덴의 연구팀이 ‘European Journal of Human Genetics’ 에 발표한 논문에서 실험군 14,024명의 성인남성 중 166명이 사춘기 이전인 11세부터 흡연을 시작한 그룹을 모아서 이들의 자손 중 아들들을 관찰한 결과 이들이 9세 이전에 매우 높은 몸무게를 보이는 것을 확인 하게 된다. 이는 그들이 성인으로 자라면서 비만 등과 같은 다양한 관련 질환에 취약해지고 결국 수명이 단축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부모세대에서 DNA 메칠화 패턴을 포함하는 몇 가지 후성학적 지표들의 특이점들을 찾아내었고 그 지표들이 자손들에게도 전달되어 후성학적 유전자 발현 조절을 통하여 과체중 등 관찰 되어진 현상들을 유발한 것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지놈(Genome) 프로젝트의 가세
 
  2001년 지놈(유전체)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인간 지놈의 초기 지도가 완성되었다. 지놈, 즉 유전체는 한 생물 종의 완전한 유전정보를 담고 있으며, 유전 정보의 단위인 개별 유전자들이 생명 활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오랜 기간 알려진 사실이다. 지놈의 해독 결과 원래는 10만 개 정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유전자가 실제로는 2만~2만 5천 개 정도만 있다고 밝혀져서 과학자들의 예상을 깼다. 또한 이들 유전자가 인체의 모든 생명 현상을 통제하고 지령을 내린다고 생각하였지만 유전자를 활성화하고 발현시키는 것은 유전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크로마틴 환경의 영향에 크게 좌우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은 DNA이고 우리의 정보가 여기에 프로그램 되어 있지만 정작 유전이 되는 현상은 유전자의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주변 환경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유전적으로 100%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해도 각자 나이가 들어가면서 외모와 건강 상태는 물론이고 암과 같은 각종 질병의 발병률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100% 동일한 유전정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구결과는 처음에 거의 유사하던 후성학적 지표들이 노화가 진행되면서 서로 매우 다른 패턴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양한 환경적 또는 생활습관 등의 요인에 의해 유전자의 발현이 변화하게 되면 인간의 생명 활동 역시 변화하고 그 결과로 다른 변화들이 유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부분들이 후성학적 연구로 설명이 가능 해지고 있다. 생명과학 및 기초 의약학 모든 분야가 지놈 프로젝트의 결과에 큰 영향을 받고 있고 후성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기존 유전학, 분자생물학이 단일 또는 몇 개의 관련 유전자들만으로 인과관계를 밝히는 연구였다면 이제는 전체 유전체의 스케일로 후성학적 전사발현 조절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에피지놈(epigenome)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고 추후 그 결과가 가져다 줄 사실들은 실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에필로그
 
  후성학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선천적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뿐만이 아닌 살아가는 환경과 우리들의 생활 습관과 같은 후천적인 요인들 또한 상당히 중요함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즉,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내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유전자 이외의 후성학적 정보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를 포함한 자연의 많은 생명체에는 자신뿐만이 아닌 선조들의 경험과 삶 그리고 주변 환경의 정보가 입력되어 있다는 의견이다. 이로서 후성학은 우리에게 “우리는 어떠한 하루하루의 생활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가?” 라는 또 하나의 예상치 않았던 숙제를 던져준 셈이다.

 

 

서상범 중앙대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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