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셈법이다. 주차공간이 부족하면 주차료를 인상한다. 도서관 열람실의 자리가 부족하면 졸업생 전용 입장권을 판매한다. 부족에 대응해 선보인 국립대의 해법이다. 물론 주차공간이나 열람실 좌석의 확대는커녕 ‘장소난’의 해소조차 확언하지 못한다. 다만 누군가의 지갑이 얇아지는 만큼 다른 누군가의 금고가 메워진다는 점만이 확실하다. 마치 건강 운운하며 세금인상을 이룩해낸 정부의 위대한 기조와 겹쳐 보인다. 차라리 착취나 수탈에 가까운 노골적인 조악함은 헛웃음을 유발한다. 한데 삥 뜯는 것과 다름없는 횡포에 분노보다 서글픔이 앞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억제요소를 지불이라는 방식으로 귀결시킨 이 괴이함이, 누군가에게는 ‘먹혀드는’ 폭력이다.
‘그깟 푼돈’이라 지껄이기에는 각박한 삶이 여럿이다. 권리의 박탈이 ‘없는 자’에게만 통용되는 사회는, 이미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입을 위해 공부하고, 취업을 위해 졸업하며, 먹고 살기 위해 버티는 우리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노동의 목적은 자본으로 치환되고, 삶은 소외된 채 생존만이 목표다. 물론 ‘없는 자’의 얘기다. 자본을 무기삼아 휘두르는 폭력은 이미 번속이지만, 저항할 수 없는 생존의 위협이 스스로를 옥죌 뿐이다. ‘가진 자’가 내던진 주민세나 주세 따위의 소소함에도 소스라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파업과 시위는 생존위협에 대항하는 유일하고도 처절한 몸부림이지만, 그 시간조차 아까운 실정이다. 세월호 사건에서의 보상금이라는 워딩은, ‘가진 자’가 휘두른 자본이라는 미끼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출 따름이다. 모든 사고와 행동이 손익계산서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경제적 필요성에 따른 태도는 차별과 혐오를 부추긴다. 난민의 수용 여부는 경제적 지표로 평가되고, 맞닿아있지 않은 전쟁은 자신만의 평화로 점철된다. ‘브렉시트’나 ‘트럼프’가 남 일이 아니다. 만연한 ‘성혐오’는 아직도 ‘군대’와 ‘임신’으로 기여도를 따지고, 동성애는 ‘출산’과 ‘에이즈’에 얽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부차량과 외부차량’, ‘재학생과 졸업생’이 가까이 있음에도, 눈앞의 이익만을 좇을 뿐이다. 계산기를 두들기며 경계를 긋는 와중에 모든 담론에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고 철저하게 이분화 된다. 삶은 해어지고 싸움만이 반복된다. 물론 비무장지대의 극소수는 생존을 담보 삼아 자신만의 현명한 셈법으로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를 넘어 우리 사회를 잠식했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문명은 허울에 가까워졌다. 손익만을 따지는 자본주의 사고가 팽배해졌고,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은 이익으로 변질됐다. 돈을 지배하는 ‘가진 자’가 돈에 지배되는 ‘없는 자’를 지배할 따름이다. 자본으로 말미암은 ‘쩐의 전쟁’에서 가지지 못한 자만이 피 흘리고 있고, 이해와 공감은 결여된 채 적대감만이 유지된다. 끼리의 다툼은 지배자에게만 유익하지만, 눈앞의 미끼에 현혹될 뿐이다. 결국 서열 싸움은 무한히 반복되고 찰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우리만이 남아있다. ‘돈은 인간 노동과 삶을 소외시키는 정수이며, 인간이 돈을 숭배하면 할수록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마르크스의 경고가 눈앞에 닥쳤다. 삶의 목적이 생존으로 회귀한 지금, 우리는 야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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