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트럼프가 이겼다.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말들을 쏟아내고도 당당하게 승리했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짜놓은 견제와 균형의 보루마저 무너졌다. 그들은 애초에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다수의 독재’를 우려했다. 그래서 행정부와 입법부를 분리하고 다시 입법부를 둘로 쪼갰다. 개인과 집단의 도덕성, 자제력 따위를 불신한 결과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탄생했다. 이 획기적인 시스템은 미국 민주주의,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를 수호하는 기둥으로 자리매김 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무력화됐다. 공화당은 백악관은 물론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모든 빗장이 풀렸다.
 폴 크루그먼의 말처럼 ‘끔찍한 밤’이 찾아왔다. 현실에 대한 절망이 가득한 밤이다.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은 ‘트럼프는 내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절규한다. 기묘하지만 낯설지 않다.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5개월 전 영국은 국경을 닫고 고립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정당 대표가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상식’에 대한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언제 제2의 브렉시트, 제2의 트럼프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인간존엄성은 민주주의의 궁극적 목표이자 존재 이유다. 그러나 광장으로 나온 혐오와 차별은 인간존중의 가치에 노골적으로 의문을 던진다. 실제로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이후 혐오범죄가 급증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라는 게 투표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선언은 종이 위에만 남았다. 인종, 종교, 성별이 다른 인간을 공격해도 괜찮은 시대가 열렸다. 혹자는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이 촉발한 분노의 표현이라 해석한다. 물론 분노 자체는 정당하다. 틀린 것은 분노가 향하는 방향이다. 저항은 위를 향한다. 아래를 향해 넘실거리는 분노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이 지옥문을 연 것은, 또한 민주주의다. 반(反)민주적인 선택이 민주적으로 이뤄졌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투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반하는 의제에 표를 던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왜 민주주의가 수호되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왜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했다. 민주주의는 인간존엄성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체제였다. 그만한 합의는 이뤘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지킬 방법만 고민했다.
 자만이었다.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는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왜 지켜야 하는가?’ 다. 안타깝게도 그 답을 찾은 이는 생각보다 적었다. 그래서 우리는 패배했다. 끔찍한 밤, 우리는 우리를 몰랐음을 알았다. 아무리 좋은 이상도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도태된다. 민주주의 그 자신마저도 그렇다. 그래서 민주주의다.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민주주의인가를 묻는 것이 출발점이다. 답답한 과정이다.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포기해버리긴 이르다. 미국 최초의 가톨릭 교도 대선후보였던 앨 스미스는 ‘민주주의의 모든 유해함은 더 많은 민주주의로 고쳐질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 이 체제는 절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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