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멈췄다. 영화관에 가지 못했다. 연일 터져 나오는 경천동지할 뉴스를 따라잡느라 극장 갈 틈이 없었다. 어느 시나리오작가의 상상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여느 막장 연속극의 작가도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한, 이른바 ‘박근혜 게이트’는 우리 문화예술계의 상상력을 비웃으며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었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최악의 현실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실시간으로 속속 도착하는 특종기사들은 그 충격과 경악과 공포, 기이한 우정과 의리와 로맨스, 협박과 갈취와 사기, 탐욕과 도착과 사이코패스, 사이비 교주와 빙의와 굿판, 그리고 공주와 실세와 간신의 드라마로 조폭 영화에서 오컬트영화까지 세상의 모든 장르를 가로지르며 온갖 자극적인 소재를 다 끌어모아 전대미문의 작품들을 연일 시간별로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그것도 공짜로. 그러니 영화는 뭐하러 보나. ‘내가 이러려고 영화평론가가…’라고 중얼거리니 진짜로 자괴감이 몰려온다. 울적한 심정으로 지난 3년 8개월간, 의심을 품어온 순간들을 다시 떠올린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었던, 답답하고 억울해서 열폭했던 순간들.
S# 1. 세월호, 메르스, 개성공단 폐쇄, 가습기 살균제, 사드 배치, 국정 교과서, 위안부 합의, 백남기 농민……은 건너뛰어야겠다. 다들 나보다 잘 알고 있고, 지면도 모자라다.
S# 2. 세월호를 다룬 <다이빙 벨>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 사태가 빚어졌다고 믿지 않았다. 그걸 믿기에는 이 영화의 파급력은 너무 약했고, 벼룩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집 한 채를 날리는 꼴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바보짓은 이 정부의 지능지수에 걸맞는다). <다이빙 벨>은 핑계고, 부산영화제가 밉보인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틀렸다. 말 안 듣는 자에 대한 철저한 응징은 이 정권의 가장 강력한 신념이다. 불명예 퇴진당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S# 3. 한국영화계 파워 1위인 CJ의 수장도 내쫓는 판에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쯤이야.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좌파영화’<광해>(2012)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386 좌파의 숙주’로 낙인찍혀 내쫓겼다. 부산영화제는 MB 정권이 ‘좌파의 본산’이라 이미 낙인찍은 곳이다. 내가 아는 부산영화제는 사실 왼편보다는 오른편에 더 기울어져 있는데…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S# 4. BIFF 사태가 시작된 2014년에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느라 분주했다는 게 이제야 밝혀졌다. ‘반정부 예술인들을 어떤 식으로든 통제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작성된 리스트라 한다. 이 리스트는 문체부와 문예위로 전달되어 지원사업 선정에 반영하도록 지시되었다.
S# 5. 누가 보나 ‘좌파’인 어느 영화감독은 9,473명의 이름이 담긴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내가 그간 얼마나 열심히 여기저기 서명하고 다녔는데!” 난 그의 분노를 이해한다. 반면 평생 가봐야 지원서를 낼 일이 없는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의 이름은 왜 거기 있을까?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다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까무룩 까먹은 게 분명하다.
S# 6. 그런데 블랙리스트는 하나만 작성된 게 아니다. 지난번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 심사에서 탈락한 일단의 개인과 단체는 모두 부산영화제 사태와 관련해서 지지 성명을 내놓은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덕분에 심사위원들의 일은 한결 간단해졌다. 시나리오를 읽고 포트폴리오를 검토하는 대신 블랙리스트만 확인하면 되니까.
S# 20까지 준비했는데 허락된 지면이 끝나버렸다. 무지한 자들이 ‘문화융성’ 운운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융성은 됐고, 판을 깨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봤다. 내가 틀렸다. 이 판만 깨트린 게 아니라 한 국가의 판을 깨버렸다. 안 그래도 울적한 데 저 멀리서 트럼프라는 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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